무등산 시설지구는 정비 중
무등산을 찾아간다. 가을이 한창일 때 백마능선을 걸어보고자 했는데, 겨울이 다되어서 찾게 되었다. 가을이면 억새가 바람에 흩날릴 때 마치 백마의 갈기처럼 보인다하여 백마능선이라지. 무등산을 갈 때마다 말안장처럼 잘록한 능선을 바라만 보았는데….
백마능선을 걷는 길은 무등산을 횡단하여 화순 이서면까지 가는 길이다. 돌아올 길이 무척 힘들겠다. 버스를 타고 증심사로 향한다. 시설지구는 아주 낮선 곳이 되었다. 길옆으로 즐비하던 가게들이 철거되고 새롭게 정비가 한창이다.
서둘러 오느라 아침도 못 먹고 왔는데. 김밥 살 곳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가다가 쫄딱 굶는 게 아닌지. 북적거리는 상점들 사이로 구경하면서 들어가는 맛이 좋았는데…. 다행히 아직 철거가 안 된 건물이 있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한다. 예전 같으면 흥이 한창 나있을 시간이지만 아주머니 얼굴이 밝지 않다.
매화꽃 피던 마을은 사라지고
얼마 전 읽은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되새기면서 증심사 취백루 옆을 지나친다. 갈림길을 만나고 건물이 몇 채 보이는 계단 길로 올라선다. 신림마을이 있던 곳. 계단을 오르는 길옆으로 아주 작은 교회도 보이고, 철거를 기다리는 폐가도 있다.
폐가 담에는 평화통일(平和統一),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고 써 놓았다. 철거라는 글을 쓰면서 빨간 페인트로 지우려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은 검은 글씨. 가슴이 슬프다. 너무나 원하는 말인데,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마을 높은 곳에는 당산나무가 크게 섰다. 450년 됐는데 무척 크다. 산행을 막 시작했던 사람들이 나무 아래 앉아서 숨을 돌리고 있다. 예전에는 당산나무 아래로 집들이 많이 있었는데, 마을 쉼터였던 나무 그늘만 남았다.
정비가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살가운 정이 없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사람들. 공원이 되고나서 마음대로 집도 못 짓게 하더니 결국 생활 터전을 내주고 말았다. 봄이면 매화꽃이 피던 마을이 보기 좋았는데. 당산나무 사이로 건너편 세인봉이 쓸쓸하게 보인다.
겨울향기가 피어나는 산길
세인봉을 바라보며 산길을 간다. 산책하듯 가는 길이 좋다. 애들과 함께 나온 가족 산행객들의 재잘거림도 즐겁다. 혼자 가는 길이 더욱 허전하게 다가온다. 산길은 겨울향기가 물씬이다. 밤새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는 등산객 발걸음에 점점 활기를 찾아간다.
산길은 가파르게 올라서더니 중머리재로 오른다. 활짝 펼쳐진 중머리재는 햇살을 가득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첩첩이 쌓인 산들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나도 나무의자 하나 자리 잡고 앉았다. 좋다. 적당히 데워진 몸은 시원한 경치에 빠져 들어간다. 산 아래로 땅에서 피어나는 하얀 안개가 자꾸만 눈길을 잡는다.
장불재로 향한다. 가는 길에 광주천 물이 발원한다는 샘골에서 물 한 모금 한다. 시원하다. 용추삼거리를 지난다. 한참을 고민한다. 수정병풍이라는 서석대를 가려면 용추삼거리에서 중봉으로 올라야 하는데, 오랜만에 산행인지 힘들다. 그래 오늘 목표는 백마능선이지.
반질거리는 돌계단 끝으로 하늘과 만나고 장불재가 나온다. 해발 900m. 재가 평원이다. 돌기둥 두 개가 문이 되었다. 바람을 피해 대피소에 앉아 간단한 요기를 한다. 입석대로 향하는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오늘은 그냥 먼 곳에서 바라만 보기로 한다.
백마능선에서 바람을 맞다.
앙상한 겨울 억새들이 바람을 맞는 곳. 바람이 차다. 모자에서 귀가리개를 펼쳐 쓴다. 혼자 가는 산길. 더욱 춥다. 장불재에서 방송국 안테나를 뒤로하고 백마능선으로 향한다. 부드럽게 굴곡진 능선이 어서 오라 한다. 큰 나무가 없이 갈대만 능선을 덮고 있는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말안장처럼 편안한 길을 내려섰다 올라간다. 억새가 낮게 자라고 있는 길. 억새는 이미 생명이 다했지만 아직 제 몸을 버리지 못하고 산을 지키고 있다. 조금 일찍 왔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백마 갈기처럼 바람에 날리는 은빛 억새 장관을 볼 수 있었을까? 다음에 또 와야 할 것 같다. 가는 계절에 대한 아쉬움인지 차가운 겨울햇살에 억새가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바람에 몸을 맡겨 누워버린 억새. 산 아래로 구불거리는 길이 아름답다.
능선 길 제일 높은 곳이 낙타봉(932m)이다. 마치 낙타의 등처럼 솟았다. 조금 거친 바위들이 기암처럼 서있는 낙타봉에 올라섰다. 조망이 좋다. 안양산으로 이어진 철쭉길이 길게 이어진다. 봄이면 철쭉 축제가 열리는 곳. 지금은 황량하고 썰렁하기만 하다.
무등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또다시 능선을 걷는다. 혼자 걸어가기 딱 좋은 길이다. 한사람 갈 정도 걷기에 적당하다. 마주 오면 비켜줘야 한다. 혼자 걷다보니 오는 사람마다 비켜선다. 처음에는 인사하는 즐거움. 나중에는 왜 나만 비켜주지? 내가 혼자 가니까?
혼자 걷는 산길. 여유로운 산길을 즐기려고 했는데, 가릴 것 하나 없는 산길은 오히려 더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안 좋은 기억들. 그래서 혼자 있으면 마음에 병이 되나 보다. 가끔가다 보이는 소나무. 아늑한 그늘을 만들고서 앉았다 가라하는데 혼자라서 싫다.
능선은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지더니 안양산 정상(853m)이다. 맞은편으로 무등산 전경이 펼쳐진다. 서석대, 입석대, 규봉암까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무등산 정상에 아름다운 바위들이 총총히 서있다. 하지만 갈 수 없는 곳. 그 아래 군부대가 막아서고 있다. 언젠가 저곳을 마음 놓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양산휴양림으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너무 급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산길을 냈을까? 낙엽이 쌓인 흙길을 먼지 풀풀 날리며 미끄러지듯 내려 왔다. 어떻게 돌아가지? 화순읍을 향해 도로를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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