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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populism), 요즘 자주 듣는 말이다. 어떤 이나 어떤 세력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할 때 마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처럼 사용되고 있다.

호손의 소설에 나오는 주홍글씨는 A다. 간통(Adultery)을 뜻한다. 최근에 사용되는 포퓰리즘의 용례를 보면, 이 뜻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여론에 따르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간통으로 규정해 '손가락질 총알'(指彈)을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라고? 민심을 따르는 게 무슨 문제인가?

옥생각할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가 의심스럽다. 하나는 과연 포퓰리즘의 극치라고 비판되는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떠나, 그 행위가 정말 잘못된 것인지 따져보고 판단하자는 것이다.

지난 23일 한나라당의 정몽준 대표는 "4대강 사업 비판은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촛불시위를 디지털 포퓰리즘으로 비판한 바 있는 작가 이문열이 지난 달 26일 다시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입에 담았다. 세종시 원안 추진 입장을 밝힌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포퓰리즘의 변형이라고 비판했다.

민주주의란 용어를 있는 그대로 풀면 '민'(民)이 주인인 체제다. 옳든 그르든 궁극적인 판단이나 결정은 민이 한다는 말이다. 그 민의 다수가 생각하는 바가 민심이고, 여론이다. 여론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명하게 드러난 여론을 거부하는 것은 더 문제다.

세종시 문제는 논란이 된지 오래다. 때문에 민이 뭘 몰라서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우기기 어렵다. 정부가 이런저런 수정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 따라서 대안이 없어서 민이 헷갈리고 있다고 고집하기 어렵다. 숱한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된 민의 마음은 원안대로 또는 확대 추진하라는 것이다. 이런 민심을 따르겠다는 것이 왜 잘못인가?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무지하고 몽매한 민의 생각과 상관없이 세종시는 잘못된 것이다. 백년대계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고, 국가경쟁력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이런 논리, 정말 웃기는 소리다. 학자나 지식인, 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이것은 세종시 문제에 대해 정답이 없다는 의미다. 선택의 문제, 가치의 문제다. 마치 나라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듯하는 그들을 보면 이런 카피가 떠오른다. "쇼를 해라, 쇼를 해."

그런데 누군가가 세종시는 잘못이라고 멋대로 규정하고, 그에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선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소가 웃을 일이다. 뭐든 그렇지만, 특히 전문가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는 사안이라면 더더욱 다수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이걸 부정하는 건방은 정말 주제넘은, 가소로운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파시즘의 영혼을 가진 자(mental fascist)일 수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니가 뭔데?"

4대강 사업에 대한 여론의 흐름 역시 다르지 않다. 한반도 대운하에서 시작해서 벌써 얼마 동안이나 논란을 벌여왔나. 그게 뭔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대학 나온 장삼이든, 못 배운 이사든 다 안다. 그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입을 모아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다.

포퓰리즘은 나쁜 게 아니다

지난 23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여론을 물었다. 질문은 간단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한다'가 36.1%였다. '규모를 축소해서 추진해야 한다'가 32.9%였다. '원래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27.1%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결코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답은 명확하다. 중단하든지, 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것을 인기영합의 포퓰리즘이라 공격하고 있다. 민의를 거부하는 쪽이 따르는 쪽을 힐난하는 꼴이다. 딱 적반하장이요, 아가사창(我歌査唱)이다. 그들의 논리를 뒤집어 보면, 야당이 여론과 맞서라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 상 여론에 저항하는 야당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민심을 외면하고 여당에 동조하는 정당은 예(yes)를 일삼는 '예당'일 뿐이다.

다른 하나의 의구심은 이것이다. 포퓰리즘은 나쁜가? 포퓰리즘이란 개념은 사실 광범위하고, 애매한 개념이다. 어쨌든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보면 나쁜 케이스도 적지 않다. 파시즘이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좋은 예도 있다. 특히 실제와 달리 나쁘게 알려진 것이 있다. 예컨대 포퓰리즘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이즘이 특히 그렇다.

언론인 김영길이 전하는 마리오 라포포르트 교수의 정리는 이렇다.

"페론 집권시기인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했다. 이런 수치의 발전은 아르헨 역사상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페론은 정권초기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으나 아르헨 역사상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이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가는 데 이바지했다."

이런 페론의 업적이 폄하된 것은 아르헨티나에 들어와 있던 미국 등 해외자본의 불만 때문이었다. 페론이 모든 기간산업을 국유화함에 따라 이들이 반발한 것이다. 페론 집권기간 동안 국민의 60%를 차지하던 극빈서민들은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받았다. 그럼으로써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연금제도와 휴가, 상여금, 무료의료혜택 등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했다.

이처럼 친서민 노선과 정책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나쁜 것으로 악마화했다. 그 후, 국민적 인기가 높은 페론을 명목상으로만 계승한다고 표방한 메넴 친미정권이 아르헨티나를 거덜 내면서 페론주의(포퓰리즘)는 나쁜 것으로 기정사실화됐다. 그러나 라포포르트 교수가 밝히는 것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좋은 것이다. 요컨대 포퓰리즘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서민을 위하는 노선·정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과연 포퓰리즘의 참뜻을 몰라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들이 정말 대중영합을 싫어하고, 그럼으로써 나라살림을 들어먹는 걸 꺼린다면 부자감세를 하고, 대규모 적자재정을 편성하고,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을 뒤엎고, 하나의 사업에 예산을 퍼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그들이 의외로 솔직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단연코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바로 친서민 정책이라 한사코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민심을 거스를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정리해 보자. 포퓰리즘을 거론하는 의도가 대중영합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틀렸다. 민이 주인인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뜻이 최종 심판자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에게 그럴 권능이 있는지 묻고 싶다. 대선에서 설사 1000만 표 차이로 이겼다고 해도 그에게 국민의 뜻을 거스를 명분은 주어지지 않는다. 나라의 100년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의 현인이라고 할지라도 민심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일시적 감정 때문에, 얕은 이해 때문에 반대여론이 많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갖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 답이다. 차근차근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반대는 당연한 것이다. 여론이 수긍하면 반대로 당연히 수그러들 것이다. 그러나 민심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해서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오기를 부려서는 안 된다. 나라의 주인이 싫다고 하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못하는 게 당연하고, 또 당연하다. 이런 체제가 싫다면 백이·숙제처럼 산중에 틀어박히면 된다.

페론이즘에 대한 왜곡에서 알 수 있듯이 기득권 세력은 친서민을 싫어한다. 부를 나누는 것이고, 이익을 양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일부에서 포퓰리즘을 들먹이며 핏대를 세우는 것이 결국 친서민을 부정하는 속내를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호손의 주홀글씨 'A'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간통'에서 '유능한'(able), '천사'(angel)로 바뀐다. 이제 포퓰리즘도 그렇게 될 것이다.


#포퓰리즘#세종시#4대강#민심#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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