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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일요일 아침에 이불 한 채를 빨았습니다. 목요일 저녁에 담가 놓았는데 날이 꾸물거려 이틀째 못 빨고 있다가 일요일 아침에 하는 수 없이 빨았습니다. 빨래기계를 안 쓰는 우리 식구는 기저귀이든 이불이든 청바이지이든 손으로 빱니다. 청바지를 한 벌 빨아도 그렇지만, 이불 한 채를 빨고 나면 팔다리 허리 어깨가 뻑적지근합니다. 두툼한 이불이라면 더 결립니다.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고 씻기는 가운데 기저귀와 이불을 빱니다. 겨우 빨래를 마친 다음 허리를 펴며 이불 담은 빨래통을 들고 마당으로 나갑니다. 빗줄기가 가늘게 흩뿌립니다. 헛. 비가 오고 있었나? 여느 빨래야 그럭저럭 말린다지만 이불은 어떻게? 한참 망설이다가 씻는방 가느다란 줄에 이불을 걸칩니다. 줄이 끊어질까 안절부절입니다. 이불 끄트머리를 죽죽 잡아당기고 비틀면서 물기를 짭니다. 이렇게 이십 분쯤 물기를 짜내니 세수대야 하나 가득 물이 나옵니다.

 

한숨을 돌리고 나서 멋쩍어 혼자서 실실 웃습니다. 그나마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빗줄기가 뿌리지 않았는데, 그때 이불을 빨았으면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괜히 해 나는 날을 기다린다고 하다가 아예 빗줄기를 만났습니다.

 

우산을 들고 사진기는 목에 걸고 홀로 골목마실을 나와 봅니다. 아기랑 빗길을 함께 돌아다니면 더 좋을 테지만 쌀쌀한 날씨에 오래도록 함께 거닐다가 고뿔이라도 들면 안 되니 홀로 마실을 합니다.

 

겨울을 앞둔 골목은 어느 모로 보면 휑뎅그렁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토록 꽃잔치 풀잔치 열매잔치를 하면서 푸르고 노랗고 붉던 기운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가만히 보면, 골목길이 아닌 도심지야말로 휑뎅그렁합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보며 철을 헤아린다지만, 요사이는 봄이든 겨울이든 너나 없이 검정이나 잿빛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더없이 많고, 밝거나 맑은 느낌 나는 옷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찻길을 구르는 자동차는 하나같이 검고 우람해지며, 거님길을 오가는 사람 또한 한결같이 우중충한 빛깔이 되어 갑니다.

 

가으내까지 익숙하게 다니던 골목을 다시금 되짚으며 걷습니다. 언뜻언뜻 스치기로는 아무 빛깔이나 냄새가 없을는지 모르나, 골목동네 사람 눈길과 삶자락으로 아주 느긋하게 거닐면서 '지는 꽃'과 '져 버린 꽃'을 들여다보고 코를 가까이하고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고 있노라면, 일흔 할머니가 쓴 책에 붙은 <지는 꽃도 아름답다>라는 말처럼, 참으로 "지는 꽃도 아름다운" 겨울맞이 골목이구나 싶습니다.

 

말라비틀어진 풀줄기와 꽃줄기가 새삼스레 곱다고 느낍니다. 다 시들어 가는 마당에 붉은 장미 한 송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에 뜻밖이라고 느낍니다. 이 붉은 장미 한 송이는 하루이틀만 피어 있지 않습니다. 지난 한 달 내내 붉디붉게 피어 있으면서 골목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후미진 샛골목을 거닐다가, 이 샛골목 한켠에 새하얗고 샛노랗게 피어 있는 골목꽃을 보고는 흠칫 놀랍니다. '겨울을 앞두고 꽃이 다 지고 없다'고 생각하는 철부지 앞에서 '나 보라는 듯'이 조용하게 꽃송이가 흔들립니다. 흩뿌리는 빗물을 머금으며 흰빛은 더 희어 보이고 노란빛은 더 노래 보입니다. 우산을 받고 십 분쯤 선 채로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이웃한 다른 골목에서는 이빛 꽃이 고무장갑 한 켤레와 함께 비를 맞고 있습니다.

 

싱그럽도록 푸른 잎사귀는 거의 모두 사라진 11월 끝물, 이 꽃들은 언제까지 티없도록 맑고 고운 빛깔을 뽐내면서 호젓한 골목 한켠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으려나요. 애써 찾아와 즐기는 사람이 없다 할 만한 골목꽃인데, 이 골목꽃들은 누가 찾아오거나 말거나 조용하게 제 삶을 잇고 있으며 제 목숨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누구 눈길이나 손길에 따라 피고 지는 꽃이 아니라, 제 삶결대로 온힘을 다하면서 자라나고 살아가며 겨울을 맞이하는 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말하고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 말하는데, 사람은 사람대로 아름답고 꽃은 꽃대로 아름답지 않느냐 싶습니다. 꽃이 꽃 구실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꽃이 꽃다운 아름다움을 피어내기 어렵고, 사람이 사람 몫을 할 수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사람다운 아름다움을 나누기 어려울 뿐입니다. 겨울 들머리에서 환하게 빛나는 골목꽃 한 송이는 사진 한 장을 선물로 내어주면서, 제 마음자리 한켠을 일으켜세우는 새힘 한 줄기를 선물로 함께 내어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골목길, #골목마실, #인천골목길, #사진찍기, #골목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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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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