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해지면 왠지 따뜻한 남쪽이 그리운 게 인지상정. 남도 끄트머리에 있는 섬 완도로 가본다. 완도에는 아직도 해상왕 장보고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 있다. 하여 완도는 해상왕 장보고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으뜸가는 테마 여행지다.
장보고는 이미 1000년도 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그러나 완도에서는 지금도 장보고의 자취가 무척이나 크고 또렷하게 남아 있다. 소세포와 불목리에 드라마 '해신' 세트장이 있다. 완도읍 장좌리에 장보고전시관도 있다. 전시관 앞바다엔 청해진의 본영이었던 섬 장도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소세포 세트장은 청해진 본영을 비롯 청해포구, 객사, 민가, 거리, 상단 본거지 등이 들어서 있어 볼거리를 선사한다. 불목리에도 해신 세트장이 하나 더 있다. 그러나 바다 풍경을 보는 맛이나 규모 면에서 소세포가 훨씬 낫다. 마치 아득한 옛날의 청해진 본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남창에서 완도대교를 건너면 완도땅 군외면이다. 여기 소재지 입구 삼거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완도읍으로 향하게 된다. 청해진 유적지를 보기 위해선 이곳 삼거리에서 좌회전, 완도 동쪽의 해안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삼거리에서 청해진 유적지 주차장까지는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린다. 여기에 장보고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에는 장보고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정보가 망라돼 있다.
장도는 이 전시관 앞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 섬이 바로 통일신라 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곳이다. 이곳에 청해진 본영을 설치한 장보고는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신라, 일본, 당나라의 삼각 무역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장보고전시관이 자리한 장좌리에서 장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직선거리로 대략 200여 미터 된다. 이 사이 바다의 수심이 아주 얕다. 하여 예전엔 하루 두 차례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 걸어서 들어가고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추억 속의 얘기가 됐다. 최근 이곳에 나무다리가 설치됐다. 물때에 상관없이 아무 때나 장도까지 들어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장도에는 아직도 당시 청해진의 화려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먼저 장도로 이어지는 장좌리 입구에 장군샘이 있다. 바다와 맞닿은 곳인데 담수가 쉼 없이 흘러나온다. 직경 1.5미터, 깊이 3.5미터로 우물의 바닥이 해수면보다 낮기 때문에 갈수기에도 수량이 풍족하단다. 옛날 장보고 대사의 군사들이 생활용수로 쓰고 또 중국이나 일본으로 출항하기 전에 담아갔던 생명수 역할을 했던 물이다. 이 샘물은 지금도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장도에서는 또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와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도 발견됐다. 해안에 통나무로 울타리를 쌓은 흔적도 발견됐다다. 장보고는 당시 청해진 본영이 설치된 장도에 해적이 침입할 것에 대비, 외벽과 내성을 쌓았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해안에 통나무로 울타리(목책)를 설치했다. 그것이 1000여 개에 이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흔적도 또렷하다.
그러나 예전엔 갯벌에 가려져 있어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 목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태풍 때문. 지난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장도를 뒤집었다. 그 여파로 장도 남쪽에서 서북쪽 해안으로 직경 40센티미터에서 80센티미터나 되는 통나무 1000여 개가 10센티미터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 있었던 게 드러났다고. 그 통나무 울타리 길이가 300미터도 넘었다고 한다.
장도에는 또 옛 청해진의 성터 흔적도 보인다. 이밖에도 몇 년 전부터 계속된 청해진 유적지 복원사업으로 현재 토성과 탐방로, 사당, 남문, 외문, 고대 등이 복원돼 있다. 섬 중앙에 자리 잡은 사당(당집)에는 장보고와 송징 장군, 혜일대사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금도 장좌리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에서 성대하게 당제를 올리고 있다.
인간 장보고는 가고 없다. 하지만 해신 장보고는 100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완도 땅의 지배자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장보고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드는 나만의 착각일 뿐이다.
완도에는 장보고 유적지만 있는 게 아니다. 군외면에 있는 완도수목원도 가볼 만하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난대수목원이다. 규모도 광릉수목원에 이어 국내 수목원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여기엔 붉가시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등 난대수종이 집단 자생하고 있다. 어떤 연구자는 난대림 군락지를 보고 '살아있는 식생교과서'라고도 했다.
나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전시관이 수준급이다. 또 수천 종의 식물을 전시·관리하면서 특성에 따라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방향식물원에선 유달리 향기를 많이 내뿜는 금목서, 로즈마리 등을 볼 수 있다. 희귀식물원도 있고, 산림의 이모저모를 알아볼 수 있는 산림전시관과 산림환경교육관도 있다.
야자와 선인장류 등이 둥지를 튼 아열대온실은 이국적인 정취를 선사한다. 동백꽃이 피기 시작한 동백나무 숲길을 걸어도 좋겠다. 발밑으로 펼쳐지는 난대림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수목원에는 숲해설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설명을 들으며 식물의 이름과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난 11월27일 문을 연 산림박물관도 이 수목원에 있다.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진 이 박물관에선 난대림의 생태와 특성, 문화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학생들의 생태학습장으로 그만이다.
박물관 내부도 내부지만 한옥이 눈길을 끈다. 한옥이 처마 끝을 기준으로 가로 47미터, 세로 37미터, 연면적 2059제곱미터로 어마어마하다. 궁궐 건물을 제외하고 한옥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이음새 등도 전통양식에 맞게 설계해 우리나라 한옥의 우수성을 알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수목원에서 나와 소세포 세트장 쪽으로 좌회전, 해안도로 타고 가다보면 정도리에 이른다. 이곳 바닷가에 '청환석'이라 불리는 갯돌들이 깔려있다. 바다 속에서부터 해안의 상록수림까지 갯돌로 아홉 개의 고랑과 언덕을 이루고 있어 구계등(九階燈)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곳 갯돌은 오랜 세월 파도에 씻기고 깎인 탓에 표면이 아주 매끄럽다. 모양도 모난 데 없이 동글동글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질 때마다 갯돌들이 서로 몸을 문지르면서 자그락자그락 연신 연주음을 들려준다.
해변 뒤편은 또 상록활엽수들로 울창하다. 오래 전 주민들이 태풍과 해일, 염해로부터 생활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한 것이다. 여기엔 해송을 비롯 감탕나무, 가시나무 등 남부 특유의 상록수와 단풍나무 등 활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자연학습을 할 수 있는 탐방로도 1킬로미터 넘게 개설돼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며 숲길을 걷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를 통하면 자연관찰로에 대한 생태해설도 들을 수 있다.
이곳의 낙조 풍경도 일품이다.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해의 모습이 황홀, 그 자체다. 요즘처럼 보름을 전후해 달이 둥글 땐 밤풍경도 멋스럽다. 선득한 달빛 아래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반짝이는 청환석 그리고 희미한 자태의 섬과 상록수림이 어우러져 오래도록 기억될 풍경을 선사한다.
구계등에서 나와 화흥포 쪽으로 가다보면 어촌민속전시관도 있다. 이곳에선 어촌의 생활사, 어획 방법, 수산양식 실태, 선박의 발달사 등을 알아볼 수 있다. 각종 어류의 표본도 볼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면 더 좋다.
완도를 오갈 때는 13번 국도와 77번 국도를 번갈아 이용하는 게 좋다. 완도의 동쪽과 서쪽 해안을 따라가는 길이기에 주변 풍광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완도타워에 올라 완도항 일대의 멋진 풍광을 조망해보는 것도 좋다. 타워에서 내려다보는 밤경치도 정말 멋스럽다. 해신 장보고의 영원한 왕국, 수목원과 갯돌바다에서 마음의 여유까지 느껴볼 수 있는 섬, 바로 완도다.
덧붙이는 글 | ☞ 청해진 본영 ‘장도’ 찾아가는 길
○ 호남고속국도 광산나들목-나주-영암-성전-해남-남창-완도-장도
○ 서해안고속국도 목포나들목-독천-성전-해남-남창-완도-장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