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맨'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외고 폐지·전환을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사교육비 절감 차원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이 아닌 여권 실세가 들고 나온 카드이기 때문입니다. 정두언과 전교조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풍경도 재밌습니다. 한 달 넘게 외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10일 교과부의 외고 개편안이 나올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외고·일반계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육전문가, 학원 강사까지 다양한 이해 집단을 아우르는 취재를 통해 '외고 논쟁'의 본질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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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고는 어떤 성격의 학교이며 어떤 문제를 안고 있기에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으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악착스럽게 외고의 유지와 확대를 주장하는가? 이미 상식처럼 된 내용이지만 이에 관하여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보자. 우선, 외고의 탄생 배경과 과정부터 보자.
외고의 기원은 1980년 7월 30일에 발표된 이른바 '7·30 교육개혁 조치'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정원 확대와 과외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개혁 조치 속에는 영재교육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과학과 외국어를 위한 특별 학교(평준화 정책의 예외 학교) 설립 방안이 들어 있었다.
이후의 논의에서 과학 영재를 위한 과학고 설립 방안이 채택되었으며 1984년에 경기과학고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외국어 학교의 설립 방안은 배제되었다. 아마도 언어 영재의 개념 정립이나 판별 기준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준화 체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러나 이 무렵 호시탐탐 탈평준화 체제를 추구하던 일부 사학 자본가들은 발빠르게 외국어 학교를 설립하였는데(1984년), 외국어고 설립 불발로 정규학교가 아닌 각종학교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본래 권력친화적인 그들은 처음부터 학력 인정 학교의 지위를 확보하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평준화 체제에서 중3 성적 우수자를 모셔오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서울시내 일부 외국어고는 각종학교 시절에 이미 입시명문고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들면서 이러한 기형적 체제에 변화가 오게 된다. 1987년 김영삼·김대중 분열 속에서 중산층 지지를 바탕으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과외 금지 해제를 시작으로 노골적인 친중산층 정책을 추진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1990년 초에는 아예 평준화 해제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방침은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쳤고, '꿩 대신 닭' 격으로 특목고 확대와 외고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고가 추가 설립되고, 기존의 예술고와 체육고가 특목고로 지정되었으며, 새롭게 외국어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1992년 신학기에는 11개(공립 1교, 사립 10교)의 외고가 특목고의 간판을 달고 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미 각종 편·불법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서울시내에서 입시명문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기존의 각종학교 외고들이 화려하게 부활했음은 물론 입시위주의 교육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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