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다섯 번이나 구속되어 7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의 나이 벌써 오십이 넘었다.
체포와 구속이 난무하는 노동 현장이지만 이렇게 한 사람이 연달아 다섯 번이나 구속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그는 유명한 재야인사도, 영향력 있는 노조의 위원장 출신도 아니다.
얼마 전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경로당에 들어가 냉장고에서 멸치 한 움큼 꺼내먹은 30세 청년에게 징역4월이 선고되었다. 동종전과로 3차례나 구속된 전력이 있고 '누범기간'에 범행을 했지만 정상을 참작해서 많이 봐 준 게 이 정도라고 한다. 흉악한 파렴치범도 아닌데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누범에 대해 이렇게 엄격하게 처벌을 해도 재범률은 늘상 50%를 상회한다. 강성철씨 또한 누범기간이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구속시켰다.
60일 넘는 단식투쟁... 착한 택시기사는 왜 투사가 되었나내가 처음 그를 만난 건 2003년, 한성여객 파업을 지원했고 화물연대 파업 당시 민주노총 앞에서 불심검문을 하던 경찰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였다.
그는 밖에서도 하기 힘든 단식투쟁을 감옥에서 60일 가까이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영등포구치소에서 한 해 동안 다섯 명의 재소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파장을 염려한 구치소 측은 쉬쉬하면서 적당히 덮어 버리려 했다. 밥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등 위생상태도 엉망이었다.
강성철씨를 비롯 당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양심수들은 이 사실을 알려내면서 집단단식에 들어갔고, 여러 인권단체들이 가세해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 법무부 장관이 직접 사과를 했고 교정행정에도 일대 변화가 오게 된다. 하지만 곧 기관의 보복이 뒤따랐다. 단식투쟁이 길어지면서 포기하거나 실신하여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람도 생겨났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투쟁을 사수했다. 그러다 구치소 측의 미움을 사 얼토당토않게 '교도관 폭행혐의'로 고소를 당해 형량이 추가되었다.
언제나 운동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고 비타협적인 투사로 알려진 그였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정이 많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그가 노동운동을 시작한 건 13년 전 한 택시회사에 취업하면서부터였다. 전남 목포가 고향인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병약했던 형님이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자, 중학교를 다니던 그는 집안형편을 생각해 학교를 그만두고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워 정비업체에 취직했다. 그런데 사고가 나 한쪽 다리를 다치게 되었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택시 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택시업체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비리의 온상이다. 경영 능력도 없는 지역 토호, 심지어 조폭 두목들까지 업체를 차려서 투자는 하지 않은 채 정부 보조금과 노동자들의 등골을 뽑아내면서 이윤을 챙겨 간다. 노동조합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사장들과 한 통속이 돼 있어 상황은 좀체 달라지지 않는다.
강성철씨는 이런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기 위해 활동하다 결국 해고를 당했다. 명백하게 노조활동을 빌미로 한 부당해고였지만 법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해고된 이후 다른 회사로 가 보려고도 했지만 업계에 만연돼 있는 '블랙 리스트' 때문에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이후 해고노동자들의 모임인 민주노총전국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약칭 전해투)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장기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해 왔다.
2006년 9월에는 '노사관계로드맵' 국회통과에 야합한 한국노총을 항의 방문했다가 네 번째로 구속되어 1년6개월의 실형을 살고 지난 해 4월 출소하였다. 출소한 후 건설현장에 나가 일하면서 구속기간 동안 인연을 맺어온 구속노동자후원회(약칭 구노회) 사무실에 나와 틈나는 대로 자원 활동을 했다. 올해 6월부터는 인권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오랜 감옥 경험 때문에 교도소(구치소)의 문제점이나 구속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활동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적절한 조언들을 많이 해주었다.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강성철씨는 구노회 활동을 신명나게 했다. 틈틈이 시간을 내서 야간학교도 다니면서 미래에 대한 꿈도 새롭게 다져갔다.
다섯번의 구속, 강성철을 자유의 몸으로험난한 투쟁 현장에서 몇 발 떨어져 구속노동자들을 후원하는 인권활동에 전념하게 되었으니 구속과의 인연도 이젠 끝 일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왠 날벼락인가?
쌍용차 점거파업에 대한 정부의 살인적인 진압이 시작되고 연행자가 속출하면서 바쁘게 면회를 다니던 그는 평택경찰서에서 주차문제로 경찰과 시비가 붙었고, 금속노조 집회현장에서 사복을 입고 채증하던 경찰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구속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이유로 구속을 시키다니……. 변호사는 '누범기간'이라 보석도 집행유예도 어려울 거라고 한다. 게다가 1심을 맡은 담당 판사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반노동자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쌍용차 파업 관련 재판에서 공소장에 나와 있는 혐의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서 구속시키고 실형을 선고한 사례도 여러 차례 있다.
강성철씨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없다. 단지 인권을 무시하는 경찰과 기업주들의 횡포에 분노할 줄 아는 남다른 감수성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마음(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활신조)이 있었기에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다섯 번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람은 "오직 정의감에 어긋날 때만 분노로 반응하며 모든 혁명의 역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상층 계급의 사람들이 발단이 되어 억압받는 자와 짓밟히는 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녀의 진단에 따르면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대해 "초연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 사회야말로 병이 들었거나 위험한 사회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강성철씨와 같은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의 격리를 원하는 사람은 이명박 정부와 기업주들밖에는 없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강성철 팀장이 하루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뜻있는 여러분들의 힘을 모아주십시오!
이 기사를 쓴 이광열씨는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