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익(李滿益1938~)전이 '휴머니즘 예찬'이라는 주제로 3년 만에 갤러리현대(대표 도형태) 강남에서 12월 20일까지 열린다. 60여 점을 선보이는데 그 중 40여 점이 신작이다. 40년 전 다친 발목과 천식으로 몸이 불편하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창작욕은 여전하다.
이만익은 고조선 '단군'을 비롯하여 고구려 '주몽', 백제 '정읍사', 신라 '처용가', 고려 '청산별곡', 조선 '춘향가' 그리고 한국전쟁 속 '이산가족사', 20세기 '한국시가'에서 보여준 한국적 심성을 뽑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두꺼운 선과 강렬한 오방색 그리고 서양의 원근감, 명암법도 무시한 평면적이고 단순한 아이콘을 개척했다. 거기에 신명을 불어넣어 기운생동을 최대로 살린 독자적 화풍이다. 게다가 그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낙천주의자라 그림에도 그런 메시지를 강하게 풍긴다.
정감 어린 한국적 유토피아 형상화
이 작품은 우리의 이상향을 민화 풍으로 형상화했다. 하늘엔 학이 날고 산엔 산신령이 있고 산봉우리엔 맨드라미가 피고 나무엔 탐스런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리고 흰옷 입은 남녀가 피리를 불고 자연과 일체가 된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평화의 노래를 부른다.
이번 전 주제가 '인간(Humanism)예찬'인 것은 요즘처럼 삭막하고 인정머리 없는 세상을 벗어나는데 그의 작업이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인가. 모든 걸 넓은 가슴으로 품는 자연의 포용성과 모성을 되찾아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고픈 마음인지 모른다.
그가 이렇게 한국적인 걸 추구하게 된 건 프랑스 아카데미 괴츠(Goetz) 수학(1973~1974) 이후의 일이다. 남을 통해 나를 본다고 그는 한국작가로서 그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아류가 될 수밖에 없고 램브란트나 루오 식을 본뜨는 것보다 그만의 화풍과 고유한 관점을 창조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창작원리를 터득한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들
그는 이럴게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의 추구해야 할 꿈과 이상, 우리만의 취향과 기질이 뭔지를 탐구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역사 속 인물에도 관심을 보인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 중 하나가 '명성황후'다. 이 작품은 그의 특징 중 하나인 장식성이 잘 드러난다.
한말 비운의 마지막 황후, 조선왕조의 국모로써 한 왕조를 굳게 지키려 했건만 제대로 된 지략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일제의 칼날에 난자질 당한다. 이 작품의 좌우에 번쩍이는 일본도가 보기에도 섬뜩하다. 이 작품은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로 쓰여 더 유명해졌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이만익과 안중근은 동향이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에서 안중근이 독서량이 많은 지식인임을 알 수 있고, "멀리 보는 안목이 없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라는 말에서 그의 역사의식이 깊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런 인품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낭만적 연애담
이번엔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흥분되는 연애담을 주제로 한 작품을 감상해보자. '서동요'와 '선녀와 나무꾼'이 그것이다. 이런 연애사건이 일으키는 낭만적 분위기가 화폭에 철철 넘친다. 이런 러브스토리는 내용이나 구성에서 그 어느 나라 것에 못지않다.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하기 위한 무왕의 전략은 가히 천재적이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루머를 퍼뜨려 사랑을 성취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을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시키며 어떤 통쾌함을 맛보게 한다.
'선녀와 나무꾼'은 하늘의 여자와 땅의 남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이야기로 천지에 상하구분이 없는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지만 여성이 인간의 삶을 살려주는 구원자로 숭배 받아야 할 대상으로 묘사되어 더욱 호감이 간다.
근현대 한국시의 감동을 그림에 불어넣다
이만익은 굉장한 시 애호가이다. 그는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음악은 집중이 안 되어도 시는 읊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하긴 한국인의 정서와 심성을 표현하는 데 시(詩)만한 장르가 있을까. 여기서는 지면상 한용운과 이육사의 것만 소개한다.
빼어난 운율에 여성적 어투가 넘쳐흐르는 한용운의 시는 평범해 보이나 사실은 비범하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와 같은 반어법은 이별에 대한 한국인의 독특한 해석과 침묵에 대한 역설적 의미를 그림 속에 농축해서 담았다.
이에 비해 이육사는 한국인의 특출한 지사적 면모를 보인다. 그 기개는 높고 그 스케일이 크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정말 한 시대의 위기를 극복해보려는 선구자의 강력한 의지가 보인다.
고구려시조 주몽과 그를 이끈 여인들
'유화자매도'는 그의 걸작 중 하나다. 유화(柳花)는 하백(河伯-강의 신)의 세 딸 중 맏이로 천제(天帝-하늘임금)의 아들 해모수와 정을 통해 주몽(朱蒙)을 낳는다. 유화는 우여곡절 끝에 금와왕의 집에 머무나 아들 주몽이 금와왕 일곱 아들로부터 박해와 위협을 받자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거기서 고구려를 건국케 한다. 주몽 뒤에는 이렇게 유화가 있었다.
여기 세 여자는 뿔피리 부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를 비롯하여 그 동생들을 그린 것으로 한 새 시대를 열었던 가족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그림 '해 돋은 나라로(주몽)'는 이만익이 '주몽'을 주제로 그린 6편 작품 중 하나다. 그가 주몽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 실향민이라는 것과 고구려에 대한 동경 때문이리라.
역사에 묻힌 무명영웅을 부각시키다
그리고 여기 '호랑이를 탄 소년'은 역사에는 나오지 않으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무명의 영웅을 그린 셈이다. 실은 주몽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거나 혹은 민중적 영웅의 전형이라 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사실성보다는 장식성과 함께 상징성이 강하다.
상반신을 꼿꼿이 세운 채 머리카락 휘날리고 말 타고 달리는 모습이 늠름하다. 또한 그 눈빛은 날카롭다. 호랑이 다스리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물병을 찬 비무장이나 그 기개와 용맹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부족공동체에 걸림돌이 있다면 그걸 과감히 없앨 자세다.
한국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해외문학과 인물
이번에는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익히 아는 알퐁스 도데의 '별'을 그린 작품을 보자. 이 작품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각별하고 애틋한지 모른다. 서양목동의 연가(戀歌)이나 우리의 정서와도 잘 통한다. 작가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별'이 주는 감동을 그림에 옮겼다.
이만익은 한국적인 것을 다루되 동시에 휴머니스트로 세계적 정서와도 맞닿으려고 애쓸 것 같다. 여기선 그런 의도가 더 드러난다. 하긴 작가에게 국경이나 인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 중요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와 '눈 오는 밤((뮌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보자. 이 작가가 재해석한 '햄릿'과 '뮌헨소녀'은 우리의 모습을 너무 닮았다. 한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했다고 할까. 하긴 그는 이제 동서양을 넘어서는 큰 작가이다.
우리의 문화원류를 찾다보면 자연히 타국의 문화원형도 알게 되어 그걸 아끼게 되지 않을까. 게다가 이만익은 예술 그 자체보다는 인간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다. '휴머니즘예찬'도 그런 맥락이다. 하긴 그의 이런 열망은 이미 그의 모든 작품 속에 다 녹아있다.
덧붙이는 글 | 갤러리현대(강남) www.galleryhyundai.com 02)519-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