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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여당 의원들에게도 사퇴 요구를 받던 '반노동' 박기성 한국노동원장이 14일 결국 물러났지만, 노동연구원은 그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고 있는 모양새다. 박 원장이 사퇴하던 날 오후 노조가 '무조건 파업철회'를 결정했지만, 연구원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원장이 단행했던 직장폐쇄 조치를 이어나갔다.

 

그러면서 사측은 직장폐쇄 해제의 조건으로 조합원들에게 '파업중단확인서' 제출을 요구했다. 이미 단체협약 일방 해지로 노조의 단체교섭권이 위축된 상황에서 단체행동권도 포기하라는 주장. "노동3권을 헌법에서 빼는 것이 소신"이라던 박기성 원장의 대표적 발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12일엔 "즉시 업무 복귀", 15일엔 "업무 수행 안돼"

 

사측에서 15일 오전 연구원 전체에 띄운 메일은 다음과 같다.

 

"노동조합으로부터 12월 15일(화) 08시부터 업무에 복귀한다는 내용의 공문이 접수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직장폐쇄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바 직장폐쇄 해제를 공식적으로 통보하기 전까지는 사무실에 들어오거나 업무를 수행해서는 안됩니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46조는 노동조합이 쟁의행위를 개시한 이후에만 사측이 직장폐쇄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연구원에서는 노동조합이 쟁의행위를 철회하겠다고 하는데 사측이 직장폐쇄를 유지하는 황당한 모양새다.

 

더구나 직무대행을 맡게 된 김주섭 연구관리본부장은 지난 12일만 해도 조합원들에게 "파업을 철회하고 즉시 업무에 복귀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김 본부장은 메일을 통해 "올해 사업과 과제를 마무리하여 기관평가를 대비하여야 할 시점이고 이와 함께 연구회(감독기관인 국무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하 경인사연)에서도 내년도 사업을 결정하여야 할 시점"이라면서 "장기간 파업의 지속으로 사실상 내년도 사업수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최소한 대폭적 예산 삭감 등의 조치가 내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본부장은 "일각에서 기관의 존폐까지 거론되는 것을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낭설로 치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몇 가지 심각한 정황들이 있"다고 강조했다.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경영진 입장에서 노조를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직장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은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압박이 아닐 수 없다. 파업 철회를 결정하면서 노조 관계자는 "조합원들이 이런 불안감을 갖고 싸우긴 어렵다"고 밝혔다.

 

그리고 노조가 업무에 복귀하기로 한 15일 오전,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업무 복귀 이후 실무적인 문제를 논의하던 사측이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노조 측에 따르면, 사측 인사들은 이날 전화통화 등을 통해 "위(경인사연)에서 내려온 것이고 이에 충실히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조합원들이 직장폐쇄에 따르지 않으면 경찰을 부른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미 전날 연구원 사측은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중 37명을 고발했고, 국무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조합원 전원을 고소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였다. 업무방해 및 퇴거불응 혐의다.

 

사측이 노조에 "업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통보하고 있는데 과연 누가 업무를 방해하는지 심히 헷갈리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같은 대응도 박기성 원장의 소신과 일치한다. 박 원장은 "노조를 다 때려잡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발언했다.

 

박 원장은 차라리 솔직했다

 

연구원 노조는 박기성 원장의 사퇴를 성과로 꼽지 않았다. 오히려 명확한 투쟁대상이 사라진 것을 걱정했고, 정부가 직접 노조 무력화에 나설까봐 경계했다. 우려는 하루 만에 현실이 됐다.

 

어떤 측면에서 박 원장은 노조가 투쟁하기 쉬운 상대였다. 대놓고 자신의 '반노동' 소신을 드러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논문 자기표절과 법인카드 남용 등의 도덕성 의혹까지 일으켰다. 이상호 노조지부장은 "적절한 시점에서 박 원장이 제 발등을 찍어줬다"고 말했다. 쟁의행위를 처음 해보는 연구원 노조의 조직력을 높인 일등공신도 박 원장이다.

 

박 원장의 튀는 행보는 정부에게도 부담이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들은 "이명박 정부의 친(親)서민 정책에 문제가 된다"면서 박 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나 박 원장의 신념과 정부의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최근 "노동3권 중 단체교섭과 단체행동권은 제한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단체협상 일방 해지, 업무방해죄 고소·고발은 노동연구원 뿐 아니라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전 공공부문에 적용되는 이명박 정부의 새로운 노무 트렌드다. 최근 파업을 벌였던 철도노조 역시 사측의 일방적 단협 해지로 갈등이 시작됐고, 지난 4일 파업 철회 이후 간부들이 업무방해죄로 고소당했다.

 

너무나 솔직한 박기성 원장은 노동 현안에 대해서도 생각을 뚜렷하게 밝혀왔는데, 현재 최대 쟁점인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 문제에 대해서는 "(이를 통해) 노조를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주 대규모 상경투쟁을 위해 여의도에 모이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기억해둘 대목이다.

 

참고로, 지난 9월부터 노동연구원 문제를 취재했던 기자에게 가장 와닿았던 그 분의 주옥같은 말씀은 다음과 같다.

 

"정권이 바뀐 줄도 모르느냐. 억울하면 정권을 잡아라."

 


태그:#박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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