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친정어머니 기일이다. 어머니는 내 존재의 뿌리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겨울날 새벽 조용히 내곁을 떠나시던 날, 방 한쪽 벽에는 얇고 큰 일력이 걸려있었다. 그 일력은 지금도 내 가슴에 생생하게 그대로 걸려있다.
어머니는 한의사 집안에 큰 딸로 태어나 글공부나 하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다가 혼인식날 초례청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셨다. 둘째아들이었지만 대가족제도인 때라 큰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나이가 어려 철없는 동서를 대신하여 규모있게 안살림을 꾸리셨고, 솜씨 좋고 왕성한 노동력을 지니신 아버지는 늙으신 아버지와 형님을 대신하여 들로 산으로 나다니시며 집안의 온갖일을 도맡아 하셨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온갖 사랑 다 받으며 곱게 자라신 어머니의 불행은 큰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큰아버지는 한학을 많이 공부하셨으나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셨다. 애써 배운 공부를 써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까워 그러셨는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큰아들의 그 다리를 고쳐주려고 의원들에게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러느라 재산도 많이 날렸다.
아버지의 집안도 동네에서 손꼽을 정도였으니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돌아가셔서 알 수는 없지만 가끔씩 나오는 어머니의 푸념을 보면 아마도 다른 자식들은 안중에 없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십여 년을 온가족이 모두 함께 살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집에서 분가를 했는데 거의 맨 몸으로 분가를 시키셨던 것이다.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할 머슴에게도 나갈 때는 세경을 줘서 내보낸다. 하물며 수년간 당신들을 위해 일해왔던 아들며느리가 나가서 남부럽게 잘 살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먹을 것 걱정없이 살아가게는 해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당장 새끼들 먹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냉정하게 빈손으로 내보낸 시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많으셨다. 그것은 후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싸우는 빌미가 됐다. 싸움은 내가 자라서까지 계속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다. 그러나 아버지는 부모님에게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부모형제에게는 효자였고, 남에게는 호인이셨던 것이다.
빈손으로 분가해서 아이들과 살아갈 생각에 어머니의 눈앞은 캄캄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친정에 제사 지내러 아이를 업고 가면 외할아버지께서는 "네가 지금 이렇게 애기나 들쳐 업고 한가하게 친정 왔다갔다 할때냐"고 호되게 나무라셨다고 한다. 그 뒤론 어머니 혼자서 아이 재워놓고 조용히 밤에 갔다가 아침 일찍 다녀오시곤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마음은 고생하는 딸을 오냐오냐 하고 받아주면 정신 차리지 못할 것 같아 매정하게 단련시키 것이 아닌가 싶다. 있는 재산 나누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으론 해결이 나지 않을 것을 이미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친정아버지의 배려에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또한번의 깊은 상처를 받으셨으리라.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쉽게 일어난다. 시댁에서 시부모님은 큰아들만 감싸고 재산도 모두 큰아들에게만 남겨주시고, 친정에선 정신 차리게 한다고 도와주지 않으니 어머니는 곁에 계시는 아버지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 위로를 해주었으면 좀 나았을텐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시며 어머니를 서럽게 했다. 그 사람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은 어머니의 한을 더 깊게 만들어버렸다.
이런 아버지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의지할 곳이 없어 고민을 하던 어머니는 모진 마음을 먹고 그만 살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셨다. 그러나 장날이면 같은 장을 보는 친정과 시댁에 행여 말 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큰오빠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살림을 늘려가기 시작하셨다. 오빠 하는 짓을 보아 "너는 괜찮을 것 같으니 너를 믿고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등 허리띠를 조여가며 오로지 일만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편안하게 쉬는 것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일만 하셨다. 그렇게 일해서 산이며 논밭을 조금씩 늘려가는 재미로, 자식 커가는 재미로 세상에 정을 붙이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도 큰집에 무슨 일만 생기면 그것은 바로 두 분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우리 형제자매들 중 어머니 곁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나는 어머니가 가끔 속상하고 힘들 때마다 한풀이하듯 내게 이야기해주시곤 해서 어머니의 아픔들을 거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흔들리지 않고 재산을 일구어 8남매 자식들을 다 가르쳐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아픔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가의 큰외숙모 역시 그 큰살림을 지키지 못하고 다 줄여먹고 말았다. 오죽하면 그런 엄마를 보면서 큰외숙모의 딸들이 고모 고생할 때 도와주기나 하지 하면서 원망했다. 시댁과 친정 모두 자신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면서 어려울 때 도움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 많던 재산 지키지 못하고 다 날려버린 것은 생각만 해도 어머니 표현처럼 속에서 천불이 났을 것이다.
당신의 온몸을 던져서 몸 고생 맘 고생하여 일가를 이루신 어머니는 결국 위암으로, 너무 늦어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암이라는 진단만 받은 채 돌아가셨다. 그냥 때가 되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의지로 한 달여 동안 식음을 전폐하시다가 떠나셨던 것이다. 고생하신 만큼 자식들에 대한 기대도 높으셨는데 그 높은 기대를 채워준 자식이 없었던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어머니가 사시면서 평생 동안 받은 그 모든 아픔들이 어머니의 몸에 병을 키웠을 것이다. 어머니의 임종 직전 모습이 떠오른다. 큰외삼촌이 어머니의 옷 속으로 노잣돈 하라며 지폐 몇 장을 집어넣어주려고 하자 단호하게 빼서 밀어내버리셨다. 나는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나 외삼촌은 당황하셨다.
부모의 사랑은 공평해야 한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있느냐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 대우는 다르다. 부모의 잘못된 처신이 사랑하는 자식들의 우애는 물론 장래에까지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 사례들을 우리는 지금도 너무 많이 접하고 있다. 특히 즐거워야 할 명절에 그런 기사들이 많이 나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어머니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은 연산군처럼 내 마음대로 한 번만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연산군이란 라디오 사극이 방송되고 있을 때였으니 그에 비교하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는 지혜롭고 강인한 한국여성으로 <장한 어머니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결국 한많은 생을 마치신 것을. 어머니의 깊은 한도 양가 부모가 조금만 신경을 써주었더라면 그렇게까지 깊지 않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