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들이에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대원사였다. 시오리 길이 아름다운 벚꽃길로 유명한 대원사는 전남 보성군 문덕면에 있는 사찰이다. 해발 609m의 천봉산(天鳳山) 품에 자리한 대원사는 백제 무녕왕 3년(서기503년)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긴 벚꽃 길을 지나 대원사에 들어서면 입구에는 방생을 위한 방생못이 있고 티벳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는 티벳 불교의 예술세계와 정신문화를 느낄 수 있는 티벳 미술품이 그득하다. 알찬 박물관이다. 한 번 들어가 보면 그 티베트의 높은 정신문화에 압도하게 된다.
대원사 입구에 새로 조성된 솟대공원을 지나면 제일 먼저 빨간 털모자를 쓰고 있는 태아 동자상들이 사방에 모셔져 있어 숙연하게 한다. 그들은 낙태로 인하여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죽은 어린 영혼들이다.
태아령들은 만불사에도 많이 모셔져 있는데 대원사의 현장 스님이 태아령 천도에 관심을 갖게 된 몇 가지 이유 중 첫 번째가 10여 년 전 서울 '마리아 수녀회'에서 보급하는 '침묵의 절규'라는 비디오를 보고 나서라고 한다. 비디오의 내용은 병원에서 인공유산 시키는 장면을 초음파 영상으로 촬영한 것이다. 뱃속에서 3개월 된 임신중절 태아가 위험한 수술도구가 들어올 때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것과 결국 겸자로 머리를 잡아 들어올려 걸레조각 같이 부숴 버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초음파 영상을 통하여 태아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달아나는 모습과 머리를 산산이 부수는 모습을 볼 때 스님은 졸도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님은 아마도 과거 전생에 그와 같은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후 '너희들의 불쌍한 영혼을 내가 구해주마'하는 씨앗이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하여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 비디오를 보았고 당시는 충격이었지만 보고 나서는 잊고 말았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그 충격을 그대로 스치지 않고 이렇게 큰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두 번째는 수년 전 일본 불교를 견학하면서 경내에 빨간 턱수건을 하고 있는 특이한 동자상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낙태·유산아의 영혼을 천도시키기 위한 태안지장(胎安地藏)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태아령들에게는 모두 빨간 털모자가 씌워져 있다. 턱받이도 입고 있었다.
출산율이 최저인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부모에 의해 낙태되는 영혼들이 150만 명을 넘는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몇 년 전 통계니까 지금은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과연 얼마나 달라질지 알 수가 없다.
대원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연꽃이다. 대원사에는 연꽃이 많다. 그것은 스님의 연꽃에 대한 관심과 솜씨가 남다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겨울이 깊어 연꽃 그릇에는 두꺼운 얼음이 얼어 삭막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러나 내년 봄이면 또다시 찬란하게 꽃을 피워내리라. 봄이면 일곱 개의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수련 등 수생식물들이 향기를 전해줄 것이다.
대부분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지만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연꽃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웃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을 없애고 자비심을 키워서 모든 이웃을 위해 사는 일이 바로 깨달음의 삶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 연꽃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이리라.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 피어나면서도 자신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물의 오염물질을 흡수하여 양분으로 삼고 산소를 내뿜어 물을 정화시킨다. 잘못된 세상에 살면서 그 세상에 물들지 않고 오염된 세상을 맑게 하고 향기로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라는 뜻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터스 상이란 게 있다. 이 상은 노벨상이 서방측의 국제상이라면 동쪽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으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서 결정하는데 제7회(1975년)는 옥중에 있던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수상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영광스럽기보다는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대나무 숲에는 90 평생 중 76년간을 관직에 헌신하며 그중 24년은 재상으로 국정을 총괄해 국태민안과 태평성대를 이룩한 정치가이며 청백리로 현재까지 청백리로 공직자의 귀감이 되는 황희 선생의 영각이 있다. 대원사와 선생의 인연이 궁금해 알아보니 1419년 남원에 유배되어 근신하시며 경서와 시운을 탐구하던 중 동향의 선배이자 대덕고승인 자진원오국사께서 높은 수행과 선도로 종풍을 크게 진작시킨 대원사를 찾아 사찰환경개선과 불사에 조력했다고 한다.
그 후 1455년 선생의 넷째 아들 직신공이 인근 파부현에 터를 잡고 살면서 정책적으로 탄압받던 대원사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사찰을 잘 보살펴준 황희 선생과 그의 아들 직신공의 송덕을 영원히 기리고자 대원사 선도들이 영각을 건립하고 선생의 진영을 봉안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여순사건으로 대원사가 불타면서 영각마저 소실되어 황씨 광주 보성 종친회의 협조로 2002년 선생의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우리들의 입버릇처럼 황희 정승이라 부르지 않고 황희 선생이라고 하는 게 이상하고 낯설었다. 나는 황희 정승을 참 좋아한다. 황희 정승 하면 아들이 술에 취해 다니자 이를 나무래도 소용이 없어, 어느 날은 의관을 정제한 채 취해 들어오는 아들을 손님처럼 정중히 맞이하여 아들의 술버릇을 고치게 했던 일화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소박하면서도 다양한 대원사는 절 분위기가 전혀 달라 오래 머무르고 싶게 한다. 각종 문화행사도 하고, 외국 근로자를 위한 일도 하고, 생명 나눔 실천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도 나누는 대원사에서 무등산 풍경소리 음악회를 개최할 때는 이해인 수녀님, 이애주 무용가 등도 내려와 함께 했었다.
그때 처음 만난 현장 스님의 세상을 향해 활짝 연 모습이 마음에 깊이 남아있어 자주 가는데 오늘 오랜만에 다시 가보았다. 겨울임에도 손가락은 시리지만 따스해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엄마아빠에게 버림받은 어린 영혼들을 보듬어주는 지장보살의 미소 때문이 아니었을까. 벚꽃 터널이 아름다울 때 다시 가야겠다. 꽃 속에서 웃는 동자상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