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복 금형 본관 건물 입구에 10년은 돼 보이는 낡은 준대형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는 데,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 자동차가 김순곤 대표의 차라는 것을 알았다. 차돌마냥 매끌매끌한 분은 아니었지만 선이 굵고 시원시원한 모습에 멋보다는 내실에 충실한 분이라는 걸 느꼈는데, 타고 다니는 차에서도 그런 성격이 드러났다.
금형은 제품의 틀을 만드는 일이다. 붕어빵의 틀처럼 금형 하나면 제품을 양산할 수 있다. 천복은 그중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에 이용되는 금형을 만드는 곳이다.
제조업은 경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사업이다. 제품은 팔기 위해 생산하기 때문에 팔리지 않는 경기에는 제조업이 힘들 수밖에 없다. 금형은 그런 제조업체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지점인 만큼 경기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금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경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금형공장을 거치게 되고, 경기가 풀리면 더 많이 팔기 위해 금형공장을 들리게 된다. 그래서 금형공장은 경기가 어려워도 불을 밝히는 것이고, 금형공장의 불이 꺼진다는 것은 경제의 사망선고와 같다.
천복금형은 IMF의 추위가 이 나라를 얼리고 있을 때인 1999년 12월에 탄생했다. 광주에도 많은 금형업체들이 있었고, 경쟁도 치열했다. 그 경쟁을 돌파하고 오늘의 천복으로 성장한 비결은 '신뢰'와 '기술력'에 있다. 신뢰와 기술력은 입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대중적인 용어지만 이 용어는 모든 기업의 바탕이 되는 가장 원칙적인 말이기도 하다.
천복의 신뢰는 먼저 손해를 감수할 줄 알아야 하고,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있어야 하며, 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원들을 책임지는 마음가짐으로 요약할 수 있다.
2001년 부도 위기에 내몰렸을 때, 김순곤 대표는 그 책임을 스스로 떠안았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는 손해를 보는 대신 업계의 신뢰를 얻었다. 전화위복이 되었는지 주변 업체에서 다시 보기 시작했고, '괜찮은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맥이 부족한 광주에서 그는 사람을 얻게 된 것이다.
금형기업이라면 반드시 납기일을 지켜야 것이다. 납기일을 못 맞추면 자기 회사뿐만 아니라 일을 맡기 기업에서도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천복의 신뢰는 납기일을 철저히 맞추는 것에서도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납기일만큼은 지킨다. 물론 제품도 최고로 만들면서.
그리고 내부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직원들과의 약속도 철저히 지킨다. 기업의 수준은 직원들의 수준이다. 직들의 사기가 높고 기술이 뛰어나야 회사의 성장도 가능하고 제품도 좋아지는 것이다. 직원들의 신뢰를 얻어야 위기의 순간 직원들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법이다.
그 단적인 예가 아무리 회사 사정이 어렵고 자금 회전이 안 된다 하더라도 직원들 월급만큼은 제때 해결한다. 또 평동으로 이사를 온 이유도 직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쾌적한 작업장을 만들어 주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천복은 기술력을 갖추는데 많은 투자를 했다. 광주에 있는 금형회사로서는 드물게 고급 설계인력 6명을 갖췄는데, 천복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 되고 있다. 광주에 있는 대부분의 업체는 디자인이나 설계는 외주를 주는 상황이지만 천복은 디자인과 설계를 자체 해결함으로써 납기일을 줄일 수 있고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당연히 일감을 맡긴 업체의 만족도도 높아진다. 기술력이 높아지니 일감도 늘어나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천복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기술에 계속 도전하고 있다. 설비도 더 좋은 설비로, 기술도 새로운 기술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생태와 환경을 중요시 하게 될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 하이브리드 배터리에도 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제조업이 살아 있는 한 금형업체 또한 살아있다. 현재 금형은 중국이 강세다. 중국은 지금 저가제품을 만들고 있지만 언젠가는 기술력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시점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한국 금형업체가 중국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더 좋은 기술력을 갖추는 길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인력이 계속 나와 줘야 하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렵고 힘든 것을 이겨내는 힘이 부족하다. 불과 20~30십년 전에는 기술 한 가지라도 배우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던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힘들다고 제풀에 지쳐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지금 잘 배워놓으면 평생 먹고 살수있는 기술을 익히게 되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포기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김 대표는 안타까운 생각뿐이다.
그는 광주에 있는 공업학교에 애착을 많이 갖고 있어 기자재나 설비 시설을 실습용으로 기증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실습을 나온다면 관심 있게 살펴주고 배려도 해준다. 언제가 저 친구들이 아니라 제조업을 이끌어 갈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60년대에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에서 벗어나 산업화를 지향했을 때 공업은 나라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 같았다. 그 이후 변화의 속도는 빨라졌고 산업도 다양해졌다. 지금은 지식서비스만 갖고도 기업을 차려 수익을 낼 수 있는 사회가 됐다. 그리고 앞으로 산업의 폭은 더 다양해 질 것이다. 세계 공업의 물줄기는 이미 중국이나 동남아로 넘어간 지 오래돼, 우리가 아는 공장의 굴뚝은 과거의 발자취로만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공장은 희망을 멈추지 않고 저가공세를 막아낼 첨단 기술력을 갖춰가고 있다. 그 첨단의 기술력과 제품을 상용화 할 수 있게 양산하는 것의 출발이 금형공정이다. 한국 공업의 기술력이 높아질수록 천복의 기술력도 함께 상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