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을 앞둔 학교는 지금 학년 진급을 앞둔 아이들의 생활기록부 기록과 점검 등 마무리 작업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수행평가와 지필평가의 학기별 성적을 합산하고, 봉사활동 시간 등 특별활동 내용을 확인 후 입력하며, 1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아이들의 특징을 정리해 꼼꼼하게 기록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생활기록부에 담길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이들이 취득한 자격증과 인증 내용을 확인해 입력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각종 경시대회나 올림피아드 수상 실적 등과 함께 상급 학교 진학에 있어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초등생부터 자격증... 스펙 쌓기 열풍기실 '스펙'은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만 통용되는 신조어가 아니다. 마치 선행학습처럼 시나브로 나이가 낮아지더니 급기야 초등학생들에게조차 전혀 어색하지 않은 보통명사가 돼 버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면 엑셀과 파워포인트 활용 등 각종 컴퓨터 활용 능력 관련 자격은 기본이고, 한자실력 급수와 토익, 토플에다 태권도와 검도, 합기도 유단자 인증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대학생의 스펙을 능가한다.
그다지 특별하달 것 없는 중학교 1학년 한 아이의 생활기록부를 점검해 보았다. 입력하기 전 원본을 대조하고 사본을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그 아이가 취득한 자격증을 일일이 살펴볼 수 있었다. 정보처리기능사를 비롯해 컴퓨터 관련 자격만 다섯 가지에다, 한자 급수 자격 하나와 어학과 관련된 인증에 이르기까지 그가 놓고 간 자격증이 책상 위에 수북하다.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을 빼면 모두 초등학교 때 취득한 것이다. 해마다 학기마다 자격증의 급수를 올리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고 하니, 자격증 취득이 그의 초등학교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추억이 된 셈이다. 이 아이의 '다양하고 풍부한' 스펙은 그의 힘겨웠을 초등학교 시절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그의 경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자격증의 수가 조금 많다 싶은 정도일 뿐 결코 유별난 게 아니다. 국영수 위주의 보습학원이 아닌 다음에야 자격증 취득은 많은 학원들의 블루오션이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그들의 경영 목표이며 홍보 전략이다. 졸업장이 '학력'이라면 자격증은 '실력'이라는 사교육의 으름장은 그렇잖아도 공고한 학벌 카스트에 신음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더욱더 큰 고통을 떠안겼다.
교사나 학부모는 물론 아이들조차 봉사활동 100시간보다 한두 번의 수상 실적과 몇 개의 자격증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현 정부 들어서 모든 대학 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다는 발표가 나면서부터는 아예 학교에조차 자격증 취득반을 개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신이 아니고서야 입학사정관들이 지원한 아이들의 재능과 잠재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격증과 인증 등의 기록을 기초 참고 자료로 활용할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학교장이 추천서를 쓰면서 해당 아이의 재능을 강조하기 위해 우선 살펴보는 것이 수상 실적과 더불어 자격증과 인증인 게 현실이다.
사교육 받으면 감점? 이젠 스펙 숨기기 열풍 부나
그렇잖아도 스펙 열풍이 거센 가운데, 입학사정관제의 도입 및 확대 방침은 불 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실 정부만 홀로 애써 부인했을 뿐, 학계와 학교는 물론, 사교육 업체까지도 예측했던 바다. 대학과 일부 고등학교 입시에서 또 하나의 과목이 돼 버린 스펙 쌓기는 흔들리는 공교육을 다시 한 번 뒤틀리게 했다.
언제부턴가 전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목표가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그것과 똑같아져 버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실용 교육'과 '산학 연계'라는 이름으로 산업 현장에서 즉각 써먹을 수 있는 기술 습득에 최우선 목표를 두었고, 취업률이 학교 홍보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는 종국에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을 왜곡시켜 기업체가 요구하는 기계의 부속품, 곧 스펙을 갖춘 좋은 상품으로 잘 자라주는 게 교육의 본령인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
학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현실에 일찍부터 눈 뜬 아이들조차 초등학교 때부터 방과 후 밤늦도록 학원과 독서실을 순례하는 건 자신의 장밋빛 미래를 위한 투자라며 기꺼이 고통을 감내한다. 교육을 통해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을 철저히 내면화한 까닭에 미래의 꿈에 도취되어 지금의 고통과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 학부모로부터 느닷없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당신 자녀의 자격증, 인증 취득 현황을 추후 삭제할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영문을 몰라 물었더니, 정부의 외고 입시 개편안을 보지 못했냐며 되레 나무라는 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사교육을 받은 지원자는 감점한다는 방안이 포함돼 있었다.
경시대회나 올림피아드에 자주 나가 수상을 할수록, 자격증이 많을수록 유리하도록 입시를 마련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되레 감점을 주겠다고 을러대는 모습에 학부모는 무척 기막혀 했다. 지금껏 우리 교육이 그래왔듯 언제 또 바뀔지 모르니, 외고에 지원하려면 사교육을 받았다는 흔적부터 우선 생활기록부에서 지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자격증이 있어도 없다고 해야 할 판이고, 아니면 독학을 통해 취득했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 됐다고 씁쓸해 했다.
사교육 흔적 지우기? 이게 뭡니까과연 정부의 사교육비 절감 방안은 애초 기대할 게 못 됐다. 외고 폐지를 외치다 반발에 부닥쳐 용두사미에 그치다 보니, 우선 여론의 뭇매를 피하려는 마음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이런 개편안을 대책이랍시고 내놓게 된 것이다. 실효성이 전혀 없다는 걸 인정하기 껄끄러웠던지, 외고 입학사정관의 능력과 자질로 능히 부작용을 없앨 수 있다고 호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긴 '자기주도학습 입학사정관제 전형'이라는 개편안 제목부터가 허울 좋은 말잔치다. 지난 7차 교육과정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주도학습의 내실화였고, 현 정부 들어 내세우는 대학 입시의 가장 큰 변화가 입학사정관제의 확대이니, 둘을 절묘하게 조합한 용어인 셈이다. 생뚱맞은 대책일지언정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혹 하게 만드는 놀라운 조어 능력만큼은 인정해야 될 듯하다.
수북이 쌓인 아이들의 자격증 더미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힘들게 입력해 놨는데, 자칫 다시 일일이 확인해 가며 지우게 생겼으니 교사로서 난감할 일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번 일로 학교 교육과 입시 제도에 대한 신뢰가 다시 한 번 크게 훼손됐고,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국회에서 처음 외고 폐지 주장이 나왔을 때, 일선 학교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과는 달리, 학원과 학부모는 물론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승자독식의 학벌 구조가 엄존한 현실에서 '절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진정성을 의심 받지 않으려면 외고 폐지를 외치기 전에 서열화된 학벌 타파가 우선이라는 얘기다.
외고의 힘에 밀려 변죽만 울리다가 결국 '사교육 흔적 지우기'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방안까지 들고 나온 정부에 분노하기에 앞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