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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진씨가 80년대 보안사에 근무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보안사>(소나무).
 김병진씨가 80년대 보안사에 근무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보안사>(소나무).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나. 2009년을 며칠 남기지 않은 지금 영웅은 보이지 않고, 나는 스산한 세모의 찬 바람으로 감기에 걸려 몸져 누워있다. 신종플루가 여전한데, 슬그머니 불안하다.

다니던 민주노동당을 그만두고, 지역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천주교 무슨 단체에서 전화가 왔다. 예전 <보안사>의 저자 재일동포 김병진씨가 현재 한국에 계신데, 한국에서 기무사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마음이 급하셨는지 바로 전화가 왔다. 통성명을 하고, 머무는 곳이 명동이어서 명동성당 앞에 있는 YWCA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16일 명동으로 향했다. 처음 만나는 분과 식사를 하기가 꺼려져서 오후 2시에 보려고 했다가, 낮 12시로 약속시간을 잡았다. 시간을 맞춘다고 노력했는데도 늦었다. 10분 정도 늦는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김병진씨도 서초에서 변호사를 10시에 만나고 오니까, 조금은 늦을 거라고 위안을 하고 을지로 입구역에서 내렸다.

YWCA 바깥문을 여니 반백의 중년신사가 시계를 보고 있다. 통성명을 하고 로비를 나왔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당신은 속이 거북해서 관계 없다고 하신다. 명동에서 만난다고 해서 명동집회가 끝난 후 지역의 동료와 즐겨가던 '닭한마리'집을 가려고 했는데 순간 고민이 된다. 점심은 됐는데, 해장술 한잔은 괜찮다고 해서, 처음 마음 먹은 닭한마리집으로 갔다. 김병진씨는 일본의 동료와 명동에 오면, 주로 삼계탕집에 가신다고 한다.

"어디지요, 저는 삼계탕도 괜찮은데요."
"요 아래인데요."

김병진씨가 앞장을 섰는데, 묘하게 길이 같더니 평소가는 집도 같았다.

기무사로 간, 갈 수밖에 없었던 재일동포 김병진

 재일동포 김병진씨.
 재일동포 김병진씨.
ⓒ 최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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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맛집이어서 그런지 2층 집인데도 손님이 북적인다. 자리를 잡고, 닭한마리를 주문했는데, 저녁시간만 하고 지금은 삼계탕만 한단다. 반계탕 둘과 반주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김병진 선생께 조심스레 잔을 드렸는데, 손 끝이 떨렸다. 멀리 현해탄 너머에서 조국의 냉대와 일본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셨을까, 싶어 애틋했다.

김병진씨는 1979년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했다. 그는 국내에 머물면서 서울의 봄을 보냈고, 김지하 등과 교류하며 한국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사건은 어뚱한 데서 터졌다. 간첩단으로 몰려 1983년 7월 9일 보안사서빙고실로 연행되었다. 그는 장기간 불법감금 당했고, 이른바 엘리베이터 실이라는 곳에서 전기 고문을 당했으며, 그의 어린 아들과 아내는 연행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가택연금을 당했다.

보안사는 심지어 '니 아내는 윤락녀로 만들어 버리고, 아들은 아버지도 모르게 해서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재일교포 3세이면서, 민족을 중시하는 그에게 가족에 대한 협박은 협박이 아니라 목밑까지 파고든 칼날이었다. 가족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말을 잊지 못한다.

마침내 김병진씨는 무너져 내렸다. 10월초 보안사 내에서 방송사와 인터뷰를 통해 간첩죄를 인정했다. 보안사는 그에 대해 공소보류 처분을 내리고, 보안사 근무를 강요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문과 가족에 대한 협박으로 인해 보안사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86년, 야반도주 하듯 기무사를 나오다

그는 1984년부터 1986년 1월 31일까지 보안사에 근무했다. 보안사에서 그가 역할은 말이 좋아 첩보분석이지, 그와 같은 처지인 재일교포 조직사건을 조작할 때 고문의 현장에서 통역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김병진씨의 영혼을 갉아 먹었다. 그때 함께 일했던 OOO는 지금 서울에서 구청장을 하고 있고, OOO는 보안사 계장을 하더니 은퇴했단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그의 아내는 둘째를 임신중이었다. 보안사에는 일본에 돌아가 아이를 낳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원을 마치겠다고 이야길 하고 야반도주 하듯이 1월 31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김병진씨가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자, 국내에 머물고 있는 친척집으로 연일 김병진씨를 찾는 전화가 왔고, 끝내 귀국을 거부하자 김병진씨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14년 넘게 조국을 찾지 못했다.

"가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저 때문에 미안하게 됐습니다."
"괜찮아요. 멀리서 오셨는데…. 저도 이제 한가해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거든요."
"하하하. 한국이니까 이렇게 이 시간에 술을 마시지. 일본에서는 절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오사카에 있습니다. 새협에서 한국어 교육을 하고,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 생협의 일본인들이 서명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영사관에서 연락이 왔어요. 보안사에서 더 이상 저를 어떻게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래서 단수여권을 발급받았습니다. 제가 일본인들에게 도움을 다 받았습니다."

김병진씨는 반일 감정이 높다. 그런 그가 일본인들의 연서명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것도 그에게는 부담이다. 김병진씨 아들도 지금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딸아이는 동경대를 다니는데, 아들은 그에 이어서 서울로 보냈다. 아들은 현재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

"아들이 제일교포 3, 4세 문제를 다루는 논문을 작성했어요. 담당 교수도 최우수 논문으로 추천하신다고 했어요. 근데 나중에 한나라당 당원인 모교수가 반대해서 안 됐지요."

당신에 이어 아들까지 고초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에 몇 번씩 말씀을 하신다. 빈병이 탁자를 채웠다. 낮 12시에 만나서 4시간 동안 단둘이서 소주 4병을 비웠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날 줄 모른다.

"김종태 사령관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김병진씨가 기무사에 민원실에 면담요청 후 민족민주열사 추모단체 연석회의 김명운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병진씨가 기무사에 민원실에 면담요청 후 민족민주열사 추모단체 연석회의 김명운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진보정치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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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진실과화해위원회에 보안사에서 제가 당한 고초를 조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난 11월 17일 나왔어요. 진실과화해위원회는 '재일동포 김병진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통지서에서 '보안사는 신청인을 83년 7월 9일 서울 신림동 주거지 앞에서 연행해 장기간 불법 구금하고 구타등 가혹행위를 가하여 진술을 강요했고, 공판 청구 이전에 허위내용이 포함된 수사 결과를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피의 사실을 공표했고, 공소보류 처분이후 보안사는 근무를 강요하는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국가배상 문제가 남았습니다만, 그 전에 현재의 보안사 기무사가 저에게 찾아와서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무사를 찾아가서 김종태 사령관에게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내일 일본으로 갑니다. 비행기표를 끊어 놓았거든요."

"지금이라도 기무사에 한 번 가 볼까요. 아니 내일 기자회견을 하지요. 기무사 사령관이 사과할 때까지 농성이라도 하지요. 사람이 없으면 일단 제가 있으니까 2명은 되었고, 몇 명 모으면 안 되겠어요?"

"기무사에 찾아가서 한 번 따지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집사람도 이번에 진실위 결정도 나왔으니까, 기무사에 찾아가서 한 번 소리치고 오라고 하더군요."

"그럼 내일 하지요. 언론사가 오든 안 오든 선생님 소원인데, 그거 못하겠습니까. 여기서 나가서 기무사에 면담을 신청하고, 보도자료도 뿌리고 현수막도 만들어서 기자회견 하면 되지요. 갑시다."

그렇게 해서 명동에 있는 가톨릭회관 환경사목위원회 사무실에서 기무사령관에 보내는 면담신청서와 보도자료를 만들어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사과 못 받고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가

 발언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김병진씨. 가족 이야기에 그는 참을 수 없어 했다.
 발언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김병진씨. 가족 이야기에 그는 참을 수 없어 했다.
ⓒ 진보정치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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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7일, 김병진씨는 서둘렀다. 명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경마장에서 내렸다. 택시를 타고 기무사에 가자고 하니까 금세 도착했다. 기자회견 시간보다 20여 분 일찍 도착했다. 기무사 앞에는 기무사를 알리는 명패 하나 없다. 정문 오른쪽에 민원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다시 기무사령부 면담을 신청했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민원실에서는 상부에 보고는 했다는 말로 입장을 대신했다. 보안사 윤아무개 공보관과 통화가 되었다. "공보관 앞으로 면담신청서를 보냈고, 다시 사령관 면담을 신청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왜 아무런 답이 없냐"고 큰소리로 항의했다. 그랬더니 "왜 감정적으로 하냐"고 말한다.

다시 전화를 했다. "식사하러 가셨어요"란 간단한 대답만 하고 다했다는 투다. 국가기관으로부터 26년 만에 인권침해를 인정 받았으면 '그들이' 먼저 찾아와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병진씨의 면담 요청을 기무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거부했다. 조촐하게 기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김병진씨는 "육체적 고통은 잊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며 "특히 가족에겐 내가 죄인인 기분"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이어 "진실이 규명된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26년간 내 가족까지 고통받았는데 기무사가 아무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기무사나 공안기관은 반드시 해체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제구금과 고문, 간첩조작, 강압에 의한 기무사 근무로 그의 영혼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에게 30, 40대는 없었다. 하지만 26년 만에 찾아온 그에게 기무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진실화해위도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지만, 통지서만으로는 힘이 없다.

그렇게 김병진씨는 국가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을 남긴 채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기무사#보안사#김병진#진실과화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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