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을 먹고 액운을 쫓는 동짓날, 마산가곡전수관에서 열린 특별한 송년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밥 먹고, 술 마시고,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여느 송년회와는 전혀 다른 아주 아주 특별한 송년회였습니다.
사실, 한 달쯤 전에 가곡전수관 조순자 관장님이 후배 결혼식 주례를 맡은 이야기를 제 블로그와 오마이뉴스에 포스팅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쓴 기사를 기쁘게 봐 주신 조순자 선생님께서 저와 경남지역 블로거들을 초대해주셨습니다. 2009/11/25 - 어~ 결혼식 주례가 여자야 !
원래는 크리스탈님과 함께 갈 계획이었지만 갑작스런 사정이 생겨 결국 저 혼자 이 아름다운 송년회에 초대되었습니다. 송년 음악회는 평소 조순자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20여분이 초대된 조촐하고 아늑한 자리였습니다.
조순자 선생님은 전국(세계)에 하나뿐인 가곡 전수관 관장이시고,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이십니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 사람들에게는 마산 MBC '우리가락 시나브로' 진행자로도 꽤 알려진 분입니다. 높낮이가 있는 독특하고 고운 억양으로 매일 저녁 우리 음악 한 곡을 소개해주시는 방송을 여러 해 맡고 계시지요.
조순자 선생님이 진행하는 '우리가락 시나브로'를 방송을 통해 우연히 듣곤 하였지만, 가곡전수관에 가 본 적은 없습니다. 교방동에 살 때는 매일 출퇴근 길에 산복도로를 오고가면서 '마산가곡전수관'이라는 입간판은 많이 보았지만, 가곡이 뭔지도 몰랐고 저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마산 MBC 우리가락 시나브로 아세요?
가곡 전수관에서 일하는 후배와 모임을 함게 하는 것이 인연이 되어 조금씩 우리음악에 가까워졌습니다. 신종플루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지난 가을에 3.15아트센터에서 있었던 음악회도 다녀왔고, 이번엔 아주 특별한 송년음악회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조순자 선생님을 또렷히 기억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어느해 5월에 마산MBC 우리가락 시나브로 프로그램을 듣다가 우연히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우리 음악을 듣고 나서부터입니다. 우리음악이 광주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참 놀랍고 신기하더군요.
음악회에 다녀와서 엉뚱한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는 것은 사실 아직 우리음악과 가곡을 듣기에 제 귀가 열리지 않은 탓입니다. 기악 합주 줄풍류 '천년만세', 가곡 평조 이삭 대엽 '동짓날', 양금-단소 병주 '세령산', 영제 사설시조 '명년 삼월에 오시마더니', 거문고 독주 '출강', 가야금-해금 병주 '황토길', 가곡 계면조 평롱 '북두칠성'을 비롯한 모두 7곡의 연주와 노래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귀가 열리지 않은 초심자들을 위하여 조순자 선생님이 MBC 방송 우리가락 시나브로 프로그램보다 더 자세히 해설을 해주셨습니다. 저의 관심을 끌었던 음악은 세 곡입니다.
한 곡은 가곡 평조 이삭대엽 '동짓달'이라는 곡인데, 황진이가 서경덕을 연모하여 쓴 시라는 해설에 꽂혔습니다. "동짓달 겨울의 긴밤을 자라서 사랑하는 임과 함께 짧은 봄밤을 길게 보내고 싶다는 여인으로서의 애틋한 정념을 드러낸 연정가"라는 소개에 마음이 가더군요.
북한음악, 흥남제련소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거문고 독주곡 '출강'
다른 곡은 거문고 독주 '출강'이라는 음악이었습니다. 이 곡은 1964년 북한의 거문고 연주자이며 작곡가인 김용실(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이 작곡한 거문고 독주곡으로 '출강'은 '쇠가 나온다'라는 의미랍니다.
흥남제련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곡으로, 작곡가 김용실이 사회주의적인 사실성을 담기 위해 실제로 흥남제련소에서 얼마간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하더군요. 북한 음악이라는 점, 그리고 노동자들의 작업장을 거문고라는 전통악기로 표현하였다는 것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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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금 해금 병주 '황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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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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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곡은 김영재가 작곡한 황톳길이라는 음악인데, 한국의 아름다운 황톳길에서 악상을 얻어 만든 곡이라고 했습니다. 가야금과 해금의 소리가 잘 어울어지는 아름다운 곡이었습니다. 저는 해금 소리에 마음이 더 끌리더군요. 이 곡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휴대전화로 녹화를 해 봤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음악으로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음악과 공연은 역시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더군요. 그리고, 큰 공연장보다 노래하는 분들, 연주하는 분들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작은 공연장 공연이 훨씬 좋더군요. 귀가 열리지는 않았지만 "아 좋다"하는 느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가곡전수관 송년음악회에는 슬로 뮤직과 잘 어울어지는 맛깔스런 슬로 푸드가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우리차와 우리음식을 연구하시는 단학예다원 조덕화 선생님과 제자분들이 차와 떡 그리고 동지팥죽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차와 다과를 나누고, 음악회 후에는 연주자분들과 손님들이 한 자리에서 팥죽을 나누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사느라고 동지가 되어도 팥죽을 끊이는 집이 별로 없습니다. 팥죽 역시 대표적인 슬로 푸드이기 때문이겠지요. 따뜻한 물에 우려내는 차와 동지 팥죽이 우리 음악과 참 잘 어울리더군요.
송년음악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팥죽을 먹는 동안 '느닷없는 행복'을 나누는 깜짝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행운권 추첨 시간이었는데, 가곡전수관 송년음악회에서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행복이라 하여 '느닷없는 행복'이란 이름을 붙였더군요.
조순자 선생님이 번호표를 추첨하여 세 분의 손님들에게 '조선의 영혼을 훔친 노래들'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한 분, 한 분 선물의 주인공이 정해질 때마다 느닷없이 찾아 온 행복에 정말 기뻐하시더군요. 즉석에서 선물이 몇 가지 더 늘어났습니다.
최근 '마산 길을 찾다'라는 책을 쓰신 서익진 선생님께서 책을 나눠주셨고, 김형준 선생님께서 가곡전수관 단원들을 위하여 상품권을 선물로 내놓으셨습니다. 모두 추첨을 통해 선물을 나누었는데, 정말 느닷없이 찾아 온 '행복'의 주인공이 되신 분들은 아이처럼 기뻐하시더군요.
내년, 5월에는 세계 유일의 가곡전수관인 '마산가곡전수관' 공연장이 완공된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음악을 들려주시고 싶다는 바람으로 매월 음악회를 열고 있다고 합니다.
가곡전수관이 이곳에 터를 잡은 덕분에 마산이 역사와 문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무형 자산이 될 수 있겠더군요. 아름다운 우리 음악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시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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