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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 때 구양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다 글씨에 능했다. 그러나 단지 그 사람됨이 어진자만이 서명(書名)을 먼 후세까지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점 즉, 인품이 어진 사람만이 후세까지 이름을 남긴다는 점을 추앙하지 않고 단지 글씨 쓰기에만 힘을 쓰니 이는 옛 사람들 중에 글씨는 잘 썼지만 사람됨이 어질지 못하여 그 이름이 종이와 먹과 더불어 다 사라져 버린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까닭이다."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 강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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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진경이 비록 글씨는 잘 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그의 글씨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드시 보물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에 양응식은 직언으로 그 부친에게 간함으로써 어려운 때에 절개를 보였고 이건중은 평소 인품이 청신(淸新)하고 온아(溫雅)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들의 글씨를 아끼는 것은 단순히 글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사람됨을 아끼기 때문이다. 자고로 현자나 철인들이 반드시 글씨에 능한 것이 아니었다. 글씨를 쓴 사람들 가운데 현자만이 이름이 남게 되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다시 찾아 볼 수 없을 뿐이다."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 강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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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양수의 제자 소동파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무릇 글씨는 그 사람을 닮는다. 옛적에 글씨를 논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평생도 아울러 논하였다. 진실로 글씨에 그 사람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면, 그 글씨가 비록 매우 기능적으로 잘 썼다고 할지라도 귀하게 여길 바가 아니다."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 강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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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말들이 주지하는 바는 무엇일까. 두 말할 것 없이 인간이 가진 재주보다도 그 삶의 고매한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실한 삶 자체가 곧 예술의 근간을 이룬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는 것이다.

운암(雲菴) 조용민/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작가,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전라남도, 광주시전, 무등전 초대작가,중국 무릉대학 명예교수 추대,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전라남도 문화상 수상,개인전 4회
 운암(雲菴) 조용민/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작가,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전라남도, 광주시전, 무등전 초대작가,중국 무릉대학 명예교수 추대,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전라남도 문화상 수상,개인전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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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서예에 바쳐 온 운암 조용민 선생도 서예의 근본을 이루는 것을 인격도야라고 말한다.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써보아야 하는 것이 서예입니다. 서예를 열심히 하다보면 사람 됨됨이가 달라져 갑니다. 자기가 쓴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자기의 결점을 고쳐가는 과정이 곧 서예입니다."

2007년에 돌아가신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하는데 평생을 바친 청자도공 기능보유자 도예가 고현 조기정 선생과의 합작품(도자기-고현 조기정, 글씨-운암 조용민)
 2007년에 돌아가신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하는데 평생을 바친 청자도공 기능보유자 도예가 고현 조기정 선생과의 합작품(도자기-고현 조기정, 글씨-운암 조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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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종이가 1년에 한 트럭분이 나왔다고 하는 조용민 선생의 말 속에는 피나는 자기 노력의 결과물이 곧 서예임을 말하고 있다.

1926년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난 조용민 선생은 서예를 하고 싶었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직원이었는데 손재주가 좋아 전축 사진기 등 정밀 기계를 잘 고쳤고 펜글씨를 아주 잘 썼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도 한글 이야기책을 베껴 썼는데 아주 명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36세 때 일찍 돌아가셔 버려 장자인 조용민 선생이 집안의 살림살이를 떠맡아야 했고 독학으로 천자문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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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은 선생의 나이 40이 되어서야 실현된다. 당시 광주에 있는 송곡 안규동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 늦깎이로 서예를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업에 얽매이다 보니 도무지 서예에 몰두 할 수 없었다. 당시 자동차부품 판매업을 하고 있던 조용민 선생은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한다. 그것을 그만두고 서예에만 전념하기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자동차부품 판매업을 정리하려고 보니 여기저기서 받아야할 돈이 1980년 당시 그때 돈으로 무려 3000만원이 넘었다. 돈이 수금 되는대로 정리하자고 마음먹고 수금에만 온통 매달렸는데 도무지 수금이 되지 않았다. 수개월여를 고민해 오던 조용민 선생은 어느 날 아침 그 차용증이며 외상장부를 서랍에서 모조리 꺼내 한데 모았다. 그리고는 마당 한가운데 쌓아놓고 결연히 성냥불을 그었다.

 "정말 한순간이었어. 정말 잘 타더라고........., 그렇게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더라고!"

조용민 선생은 그때를 회상하며 허탈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선생은 도대체 받아야할 그 많은 돈이 적힌 그 문서를 왜 불살라 버린 것일까?

서예작품 병풍
 서예작품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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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당시에 이미 운암(雲菴)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 운암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요."

조용민 선생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억여 원이나 되는 큰돈을 포기해 버린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서예가 운암이란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깨끗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해 버림으로써 마음 비움을 곧바로 실천했던 것이다. 여기나 저기나 고위급 관리와 각계의 어른이라는 작자들의 추저분한 뒷거래와 굴절, 그리고 부정한 뇌물이야기가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선생의 이 일화는 크나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물론 선생 스스로 가난하고 청빈한 서예가로서의 인생을 선택하고 살아왔다지만, 그러기에 재물로 인한 고통이 더욱 극성이었겠지만 그러한 투철한 서예가로서의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피나는 노력이 가능했고, 1989년 64세라는 늦은 나이로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차지했던 것이다.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수상
ⓒ 강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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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가로서 그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회갑이 넘어서까지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였기에 소중하고 값진 것이었지요."

당시 전국 여기저기에서 '늦은 나이에 각고의 노력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그 정신을 높이 칭송한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며 조용민 선생은 서예의 길이 멀고 끝이 없는 길임을 말한다. 그런 선생이기에 서예가 곧 인격 도야라는 깊은 경지의 세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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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미가 넘치게 글씨는 잘 그려내지만 정작 자기가 써낸 글 한 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그 글 속에 담긴 심오한 뜻도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부단히 글씨 연마를 하면서도 글 속에 넘치는 선인들의 지혜나 가치관 등을 배우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올곧은 우리의 전통과 미의식을 터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용민 선생의 이 말은 인간이 지닌 진실한 마음 그 외의 가벼운 재주나 가진 지위나 재물로 행세하려 하는 허장성세를 그대로 꿰뚫어 허물어 버리고 있다. 진실한 실천 한 조각 없이 얄팍한 지식으로 재주로 행세하며 예술이나 문학이나 학문을 말끝마다 들먹이면서 큰기침하고 거들먹거리며 거만 떠는 허깨비 인간들이 부지기수인 이 땅에서 가장 요긴한 말이 아닌가 싶다.

서예 모습
 서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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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및 수많은 공모전의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선생은 경복궁 현판, 백양사 일주문, 해인사 일주문, 도갑사 일주문, 진각국사 유적비 등 전국 각지의 굵직한 비와 현판에 수많은 글씨를 남겼다.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운암 조용민 서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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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해도 못다 이루는 게 서예지요. 서예는 한 글자 한 획만 틀려도 그대로 그만입니다. 인생도 잘 살다가 한번 잘못하면 그대로 오명이 남고 맙니다. 그렇듯이 서예도 되돌려 다시 살 수 없는 인생처럼 다시 되돌려 쓸 수 없는 예술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자기 연마와 끝없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진옥헌 내부 모습
 진옥헌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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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근교 전남 나주시 남평읍 오계리 산골 진옥헌(振玉軒) 통명산방(通明山房)에서 올해로 85세를 맞은 조용민 선생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예가의 길 위에서 또 다른 자기 수양과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선생의 그 끝없는 서예에 대한 집념은 곧 그 옛날 자신의 재물에 대한 탐욕을 용기 있게 불살라 버렸던 그 비움의 정신이었고, 또 그 끝없는 비움을 향해 오늘도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붓끝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요새는 건강이 좋지 않아 붓을 잡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조용민 선생의 그 한 획 한 획의 글씨들이 영원이 역사 속에 살아서 훌륭한 예술혼으로, 후학들의 훌륭한 삶의 지표로 빛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태그:#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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