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처리시한을 3일 남겨둔 28일 오전부터 국회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분위기다. 전날까지 진행된 김형오 국회의장의 중재가 사실상 '불발'로 끝남에 따라 여야는 한바탕 전투를 치르기 위한 '준비태세'에 돌입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도부는 이날 오전 각각 의원총회를 소집해 소속 의원들에게 '24시간 대기령'을 전달했다. 한나라당은 사상 초유의 준예산 시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새해 예산안을 연내 강행처리한다는 방침을 거듭 밝히고 있다. 민주당은 '옥쇄'의 심정으로 막겠다는 각오다. 따라서 세밑 국회에서는 여야 의원들 사이에 지난 7월과 같은 거친 '육박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 "준예산 편성이라는 역사적 멍에 써서는 안 돼"
한나라당에는 의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28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민주당과 협상의 끈을 놓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판단이 서면 끈을 놓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안 원내대표는 "준예산 편성이라는 역사적 과오, 멍에를 써서는 안 된다"며 "적어도 오늘부터 나흘 동안만큼은 똘똘 뭉쳐서 예산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예산안 단독처리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당내 결속을 주문한 것이다.
안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참석의원 수를 직접 확인하며 '군기 잡기'에 나서기도 했다. 회의 시작 직전 참석 의원수가 116명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국회가 중대한 국면에 들어서 총의를 모으기 위해 인원점검을 했는데 50명이 넘는 의원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며 유감을 나타냈다. 이날 박근혜 전 대표 등 8명은 아예 불참 통보를 했다.
안 원내대표는 "오후 3시에 의원총회를 다시 열겠다"며 "168명 의원 전원이 참석할 때까지 계속 의원총회를 열겠다, 그 정도 협조를 안 하면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밝혔다. 안 원내대표는 "오후에 열릴 의원총회에는 부대표들과 각 상임위 간사들이 인원 점검을 책임져 달라"고 재차 강조했다.
안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9시에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예산안 처리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드러냈다.
그는 "소수 야당이 반대한다고 해서 집권여당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다수당이 왜 필요하고 정권교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며 "이는 선거와 책임정치를 부인하는 헌법유린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어 "미국 의회는 아무리 입장차가 있어도 치열하게 토론한 뒤 표결만큼은 민주적 절차에 따르고 결과에 승복한다"며 "한국은 점거농성, 망치폭력 등 3류 저질 폭력에 의존하고 있는게 통탄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한나라당 자체 수정안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한나라당 김광림 예결위 간사는 "원래 이날 새벽까지 수정안을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오늘 저녁까지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며 "4대강 예산에 대해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4자회담 결과를 받아안아야 한다는 전제로 몇 가지 안을 마련한 상태"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3시 다시 의원총회를 열고 예산안 처리 관련 논의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한편 이날 의원총회에서 한나라당은 '대운하 포기 대국민 선언문'을 참석의원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나라당은 대국민 선언문에서 "대운하사업은 사업의 규모나 성격상 야당과 국민의 눈을 속이면서 밀실에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라는 것은 민주당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억지 왜곡 주장을 펼치고 있다"며 "한나라당은 앞으로도 한반도 대운하사업을 하지 않을 것임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죽으라면 죽겠다"
"죽으라면 죽겠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
"우리 뜻은 우리를 밟고 가라는 거다. 그밖에 뭘 할 수 있겠나." (민주당 초선의원)
민주당은 이강래 원내대표가 제안한 '4대강 예산의 2월 추경예산 이월'을 한나라당이 거부함에 따라 더 이상 협상은 무의미하다는 분위기다. 따라서 국회 예결위장 단상을 '마지노선' 삼아 결사항전에 돌입했다. 한나라당이 인해전술로 밀어붙인다면 '옥쇄'할 각오다.
이날 오전 9시 예결위장에서 열린 의원총회엔 비장감이 감돌았다. 정세균 대표는 "대통령이나 여당이 숫자만 믿고 국민의 뜻과 관계없이, 야당과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며 "제1야당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자"고 말해 의원들의 결전의지를 독려했다.
이강래 원내대표는 "김 의장은 (심청과 인당수 발언을 통해) 예산안이 본회의장에 오면 어떤 악역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현할 것"이라며 "한나라당이 날치기 수순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대화와 타협은 없다"는 판단이다.
민주당은 김 의장이 이날 수정 제안한 "당론 없는 표결"도 한나라당의 날치기를 위한 '협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민주당은 '청와대-한나라당-국회의장' 3면 포위공격 속에 극한 투쟁으로 야당의 선명성을 살리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등 외부 요인과 여론 부담 등으로 막판 타협에 나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발목 잡는 야당'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현명한 후퇴도 필요하다는 당내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의원총회에서 박지원 정책위의장이 "예산국회의 출구가 어디인지 여러 가지 고심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복잡한 민주당의 심경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이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에게 마지막 원내대표 회담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의 제안은 '4대강 예산'과 '전체 예산안'의 분리 심사다. 4대강 협상팀과 전체 예산안 협상팀을 따로 구성해 투트랙으로 운영하자는 것이다. 전체 예산안 협상팀은 4대강 예산을 제외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따로 만든 예산 수정안을 합치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민주당이 4대강 사업을 아예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고 격앙된 한나라당이 4대강 예산을 따로 떼 협상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김형오 의장 '자유투표 표결처리' 제안 - 민주당 "한나라당 방침과 같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2010년도 예산안을 직권상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하면서 연내 처리를 위해 예산안 통과 여부는 의원별 자유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김 의장은 28일 오전에 열린 국회 기관장회의에서 먼저 예산안은 반드시 연내에 처리돼야하며, 직권상정은 하지 않겠다는 기존 방침을 전제로 두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김 의장은 "어제(27일) 밤 1시간 동안 여야 원내대표와 대화를 나눠 본 결과 4대강 에산 문제에 대해서는 한 쪽에서 거의 100%에 가까운 포기 내지 양보를 하지 않으면 타협이나 절충이 되지 않을 듯한 현격한 차이를 느꼈다"며 "어느 한쪽이 포기에 가까운 양보를 해서 절충을 시도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이어 "어느 한쪽이 포기에 가까운 과감한 양보를 하지 않는다면 두 번째 방법은 당론 없이 자유투표를 하는 것"이라며 "국회가 각 당의 주장을 모두 올려 충분히 토론을 한 뒤 국회법과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표결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의장은 자유투표 제안을 내놓으면서 미국 의회의 건강보험 개혁법안 처리 과정을 예로 들었다. 김 의장은 "당론으로 의원의 입장을 규제하지 말고 의원 각자가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지금까지 불거진 여야의 입장차를 보면 어느 한쪽이 '포기에 가까운 양보'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김 의장 제안 중 남은 하나는 '자유투표를 통한 예산안 표결처리'인 셈인데, 문제는 이 안도 한나라당의 예산안 처리 시나리오와 많이 닮아 있다는 점에서 야당의 반발이 크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김 의장의 자유투표 제안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여야 타결 무산 시 표결처리' 방침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과반수 의석인데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것은 한나라당의 자체 수정 예산안을 통과시키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그것은 공정한 절충도 아니고 중재자 역할을 제대호 한 것도 아니다"라고 부정적 태도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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