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생결단
.. 누군들 이 사회에서 천민으로 살고 싶겠어요? 그러니까 사생결단을 합니다 .. 《손석춘,김규항,박노자,손낙구,김상봉,김송이,하종강,서경식-후퇴하는 민주주의》(철수와영희,2009) 136쪽
"천민(賤民)으로 살고"는 "밑바닥에서 살고"나 "밑바닥 사람으로 살고"로 다듬어 줍니다. 또는 "낮은 자리에서 살고"나 "낮은 자리 사람으로 살고"로 다듬어 봅니다.
┌ 사생결단(死生決斷) : 죽고 삶을 돌보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함
│ - 사생결단으로 나서다 / 이번 일에 사생결단을 낼 각오를 하고 /
│ 워낙 사생결단으로 날뛰는 판이라 / 누구처럼 사생결단하고 덤빈다든가
│
├ 사생결단을 합니다
│→ 죽고살기로 덤빕니다
│→ 죽자사자 덤빕니다
│→ 죽을 동 살 동 발버둥입니다
│→ 죽을힘을 다합니다
│→ 죽음을 무릅쓰고 다툽니다
│→ 목숨을 걸고 아웅다웅입니다
└ …
〈교수신문〉이라는 곳에서는 해마다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습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도록 한다는 낱말이라 할 텐데, 지난 열 해에 걸쳐, '올해의 사자성어'만 뽑을 뿐, '올 한 해 다짐으로 삼을 우리 말'을 뽑은 적은 없습니다. '올해를 빛낼 우리 말'이라든지 '올해를 생각하는 우리 말'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올해의 사자성어'를 놓고 신문과 방송은 한결같이 '귀기울여 듣기'만을 합니다. 이러한 네 글자 한자말하고 우리 삶이 얼마나 맞닿거나 와닿는지를 살피지 못합니다. 배운 사람들끼리만 주고받는 말이 아닌, 이 나라 누구나 스스럼없이 나누고 어깨동무할 만한 말을 즐겁게 캐내지 못하는 지식인들 매무새를 꾸짖거나 나무라거나 가다듬거나 바로잡으려고 하는 몸짓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2001년에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을, 2002년에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을, 2003년에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을, 2004년에는 '당동벌이(黨同伐異)'를, 2005년에는 '상화하택(上火下澤)'을, 2006년에는 '밀운불우(密雲不雨)'를, 2007년에는 '자기기인(自欺欺人)'을, 2008년에는 '호질기의(護疾忌醫)'를, 2009년에는 '방기곡경(旁岐曲逕)'을 뽑은 〈교수신문〉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그럭저럭 손쉽다고 할 만해, 따로 묶음표에 한자를 적어 넣지 않고도 알아볼 만한 네 글자 한자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2004년부터 2009년까지는 한자를 하나하나 읽을 수 있어도 뜻은 알기 어려운 네 글자 한자말들뿐입니다. 교수님들한테는 '밀운불우(密雲不雨)'니 '호질기의(護疾忌醫)'니 '방기곡경(旁岐曲逕)'이니 하는 네 글자 한자말이 손쉬울는지 모르고, 뜻이 남다르다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네 글자 한자말이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삶자리에서 바라볼 때에는 어떠할까요. 용산 철거민을 앞에 놓고, 이랜드 노동자를 앞에 놓고, 오래된 저잣거리 길장수 아지매와 할매를 앞에 놓고, 여느 농사꾼과 노동자 들을 앞에 놓고, 아이들을 앞에 놓고 이 같은 '문자 쓰기'를 보여주거나 들려주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 앞에서 이러한 말마디로 우리 생각을 나누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동무와 마주하면서 이러한 낱말과 말투로 뜻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키우면서 이 같은 말씨와 말결로 넋과 얼을 물려주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사생결단으로 나서다
│→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다
│→ 죽자사자 나서다
│→ 죽고살기로 나서다
└ …
옳은 말을 하고자 한다면 옳은 생각을 바탕으로 깔아야 합니다. 옳은 생각이란 머리를 굴리는 생각이 아닌 옳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바른 말을 펼치고자 한다면 바른 생각을 밑바탕으로 두어야 합니다. 바른 생각이란 머리에 가득 채우는 지식이 아닌 내 바른 삶을 밑거름 삼으면서 가다듬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 사생결단을 낼 각오를 하고
│→ 끝장을 낼 다짐을 하고
│→ 끝을 볼 다짐을 하고
│→ 마지막까지 모두 걸고
└ …
그럴싸한 말이 아닌 믿음직한 말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럴듯한 글이 아닌 사랑스러운 글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교수님이기에 네 글자 한자말로만 당신들 뜻과 넋을 나타낼 수 있는가요. 그나마 영어로 당신들 마음과 얼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한숨을 돌려야 하는가요. 교수님이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네 이웃과 동무와 식구를 깊이깊이 헤아리고 널리널리 보듬으면서 눈높이를 맞출 수 없는가요. 그나마 이런 네 글자 한자말을 우리보고 외우라고 닦달하지 않으니 고맙다고 여겨야 하는지요.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말이어야지 싶습니다. 나를 북돋우고 너를 북돋우는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키우고 너를 키우는 말이요, 나를 돌보며 너를 돌보는 말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옛 한문책을 뒤적거리는 네 글자 한자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생결단으로 날뛰는 판이라
│→ 죽을 동 살 동 날뛰는 판이라
│→ 죽어도 좋다며 날뛰는 판이라
│→ 죽음을 아랑곳 않고 날뛰는 판이라
└ …
그런데, 직장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도 있다고 합니다. 직장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는 '구지부득(求之不得)'이 뽑혔다는데, 저는 이 네 글자 한자말 또한 못 알아먹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네 글자 한자말을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네 글자 한자말은 누가 알아들으라고 짓고 있으며, 이런 네 글자 한자말은 누구들 가슴에 살포시 내려앉으면서 깨우침을 나눌 수 있는지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살길 깜깜"이요, "살길 없다"이고, "살길 까마득"인 한편, "살길 막혀"입니다. "빈손 가난"이나 "빈몸 굶음"이나 "일자리 꽝"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 말마디로 우리 삶을 적바림하자고 한다면 슬며시 비웃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글줄로 우리 삶자락을 담아내자고 하면 으레 도리질을 칩니다.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기보다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알맞지 않다고들 보는데, 알맞지 않다고 본다기보다는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우리 말을 올바르게 쓰도록 배운 적이 없는 우리 삶이요, 우리 글을 슬기롭게 적도록 가르치는 일이 없는 우리 터전입니다.
┌ 사생결단하고 덤빈다든가
│→ 죽음을 두려워 않고 덤빈다든가
│→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덤빈다든가
│→ 목숨을 내놓고 덤빈다든가
└ …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제아무리 교수님이라 할지라도 당신들한테 익숙한 대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찾을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알맞게 듣고 보고 익히고 가다듬은 적이 없으니, 대학교를 나오건 중고등학교를 알차게 다녔건 '내 가슴을 밝게 빛낼 말 한 마디' 찾거나 헤아리는 데에는 어리숙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새해에는 말을 말답게 가르치는 사람 하나 만날 수 있기를 꿈꾸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글을 글답게 여미는 사람 하나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