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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출근날인 4일 오전 서울 시내에 폭설이 내린 가운데 마포구 상암동에서 주민과 공무원들이 길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새해 첫 출근날인 4일 오전 서울 시내에 폭설이 내린 가운데 마포구 상암동에서 주민과 공무원들이 길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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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가장 도시답지 않은 날

'9년 만의 폭설'이란다. 가히 블록버스터급 날씨라 하겠다. 전기장판은 고장난 지 오래요, 가스비 무서워 보일러도 못켜고 점퍼 입고 자는 자취생에게 '三寒四溫(삼한사온)'을 지키지 않는 날씨는 야속하기만 하다. 매일 탄소를 내뿜고 사는 내가 널 탓할 염치는 없다만.

비둘기가 사라진 지 오래인 서울 성북동 산꼭대기에서 '스노보드가 이런 건가'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신발에 눈이 들어오는 게 흠이긴 하지만 흰눈을 가르며 미끄러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언덕을 내려오며 보이는 풍경에 웃음이 났다. 눈 치우는 아주머니 곁에 검은색 슈나우저 두 마리가 힘차게 꼬리를 흔들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고, 옆의 꼬마 아가씨는 삽질 한번 해보고 싶어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언덕 초입에서 차 운전자들 간에 실랑이가 있긴 하지만 사납지 않고 말랑말랑하다. 도로에선 차들이 옛날옛적 증기 자동차마냥 느릿느릿 가고 있다. 이 정취는 큰 도로로 나오면서 사뭇 다른 느낌으로 바뀌어 버렸다.

헛바퀴를 열심히 돌리다가 도저히 안 움직이자 밖으로 나와서 인상을 쓰는 운전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 아스팔트 먼지와 섞여 잿빛 눈으로 뒤덮인 길에서 난감해 하는 사람들.

부드럽디 부드러운 흰 눈에 도시가 마비되어 버렸다는 이 '코미디'에 웃음이 났다. 버스 타고 출근해서 사무실 앞 눈 푸느라 옷이 홀랑 젖어버린 '직딩'이지만 인상 쓰지 않고서 이 기념비적인 날을 어떻게 즐길까 생각해 본다.

제발 음식 배달 시키지 맙시다

4일 새벽부터 서울 시내에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어린이들이 눈 쌓인 골목길을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4일 새벽부터 서울 시내에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어린이들이 눈 쌓인 골목길을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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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시가 가장 도시답지 않은 날이다. 화려한 색이 하얗게 덮인 날이다. 얼굴 모르고 지내던 이웃들이 무장하고 나와 서로 눈 치우며 인사하는 날이다. 거리의 주인이 자동차가 아닌 날이다. 눈을 치우며 청소부 아저씨의 노고를 몸소 체험할 수 있고, 20년 전 눈놀이 할 때 코 훌쩍 삼키며 맡았던 겨울 냄새를 떠올릴 수 있는 날이다. 동네 강아지와 아이들이 함박웃음 짓는 날이다. 좀 힘들지만 왠지 웃음이 나는 날이다. 타임머신을 탔다고 생각하고 즐겨보자. 20세기로 돌아간 느낌.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재난 영화를 4D 영화관에서 공짜로 관람한다고 상상해보자. 내 눈앞에 눈이 쏟아지고 발가락은 꽁꽁 얼어버릴 것 같다. 미어터지는 지하철을 타니 재난 영화의 엑스트라가 된 듯한 기분이지 않은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은 도시가 가장 도시답지 않은 날이다. 이런 날은 하루쯤이라도 제발 도시인처럼 살지 말자.

44만원 세대인 동생, 아들딸들한테 전화 걸어 배달음식 시켜먹지 말자. 자기 밥은 자기 스스로 지어보자. 가스레인지에서 나오는 불꽃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절실한가. 따뜻한 방 안에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나가기 싫다고 배달 시키면서 이 엄동설한에 두바퀴 오토바이 굴리는 사람 입장은 생각 안 하는가.

이런 날엔 신문이나 우유 안 왔다고 따지는 전화 걸지 말자. 신문 하루 안 본다고 나만 소식에 뒤처지는 거 아니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다. 신문, 우유 보급소에 전화하지 말고 후원 ARS 전화를 빗발치게 걸어 얼어붙은 사랑의 온도계의 얼음이나 깨주자.

서울 경기지역에 대설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4일 오전 서울 세종로 사거리 인근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서울 경기지역에 대설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4일 오전 서울 세종로 사거리 인근에서 환경미화원들이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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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날씨, #교통, #폭설, #배달,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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