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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호남선 철길. 2010년 1월5일 아침 풍경이다.
 눈 내린 호남선 철길. 2010년 1월5일 아침 풍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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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이용해 통근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죠. "멋있겠다", "분위기 좋겠다", "낭만적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압니다. 그 일이 얼마나 피곤하다는 것을….

하여, 평소 열차를 타면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금세 눈을 감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어젯밤부터 눈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는 탓인가 봅니다. 눈이 내리면 설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거든요.

열차 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바깥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잠에서 덜 깬 내 얼굴과 객실 안 풍경만 보일 뿐입니다. 고개를 돌려 객실을 둘러봅니다. 열차가 아직 출발하기도 전인데 벌써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mp3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뭔가를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거울을 쳐다보며 얼굴화장을 하는 여성도 보입니다. 캔커피 하나 들고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아가씨도 보입니다. 등산화 신고 배낭을 옆에 놓은 여행객은 정말이지 부럽습니다.

목포행 무궁화호 열차. 이른바 '통근열차'다.
 목포행 무궁화호 열차. 이른바 '통근열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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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행 남행열차를 타는 통근족들.
 목포행 남행열차를 타는 통근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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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시간이 되자 열차가 서서히 움직입니다. 도시는 아직 적막하기만 합니다. 눈을 계속해서 내리고 오가는 차량은 뜸합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쯤 잠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려고 할 때입니다.

뒷좌석에서 낮게 깔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엄마가 밥 챙겨놓고 왔어, 밥 먹고. 반찬은 냉장고에 있는 거 알지, 빼서 먹고. 동생 잘 돌봐야 한다. 밖에 나갈 때는 장갑 꼭 끼고 나가고, 부츠도 신고…. 알았지?" 맞벌이 부부의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엄마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통화를 끝내는 것 같습니다.

열차가 간이역에서 멈춰 설 때마다 승객들이 몇 십 명씩 올라옵니다. 대부분 통근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두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었습니다. 털모자를 눌러 쓴 사람도 보입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목도리를 둘렀습니다.

열차를 이용해 통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월권'이라는 것을 끊어서 탑니다. 한 번의 매표로 한 달 동안 따로 표를 사지 않고 탈 수 있는 월권은 일반적인 운임의 절반 정도입니다. 대신 정해진 자리가 없습니다. 좌석표를 구입한 사람이 와서 비켜달라고 하면 바로 자리를 내줘야 합니다. 승객이 많을 땐 빈자리가 생길 때까지 서서 가는 불편도 감수해야 합니다.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진 농촌 들녘 풍경.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진 농촌 들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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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헤치고 달리는 열차.
 눈길을 헤치고 달리는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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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을 출발한 열차는 극락강역, 송정역을 거치면서 빈자리를 거의 다 채웠습니다. 열차는 노안역을 거쳐 하얀 들판을 가로질러 나주시내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나주배'의 주산지인 나주는 영암과 강진, 함평, 해남, 완도, 진도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나주역은 또 일제시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지금 사라지고 없습니다. 새 역사는 나주시 송월동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열차가 역사 안으로 들어오면 먼저 달려드는 게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과일장수, 오징어장수들이 먼저 달려들어 물건을 든 손을 내밀었습니다. 역사에는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집도 여럿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추억 속의 얘기일 뿐입니다.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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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날이 많이 밝아졌습니다. 창문에 비치던 내 얼굴도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엔 바깥풍경이 대신 들어와 앉았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엔 해 뜨기 전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 시간이지만, 눈 내리는 오늘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이 드넓습니다. 나주평야가 온통 하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새하얗습니다. 기와지붕도 오늘은 흰색 페인트라도 칠해놓은 것처럼 하얗습니다. '까치밥'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도, 배나무도 눈옷을 입었습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은 꽁꽁 얼었습니다.

철길 옆으로 나란히 국도가 놓여 있습니다. 1번 국도 광주-목포 간입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구르던 바퀴가 멈춰 섭니다. 신호등이 빨강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른 시간인데도 교통신호를 지키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한편으로는 신호등 없이 달리는 열차에 타고 있다는 게 왠지 모를 쾌감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열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 1번 국도 주변 모습이다.
 열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 1번 국도 주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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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잠시 멈춰선 일로역.
 열차가 잠시 멈춰선 일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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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처음 타본 게 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였습니다. 초저녁에 열차에 탔는데 목적지인 서울에 다음날 아침에 도착했었습니다. 밤새 열차를 탄 셈이었습니다. 장거리 여행은 으레 열차를 타고 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열차는 정말 북적거렸습니다. 열차가 멈추는 역마다 농수산물 보따리를 한 짐씩 이고 짊어진 사람들이 타고 내렸습니다. 오로지 출세해야겠다며 호미자루와 삽자루 내던지고 무작정 상경하는 누나와 형들도 있었습니다. 차비가 부족해서 '도둑열차'를 타는 사람도 간혹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삶은 계란을 소금에 찍어먹던 그 맛은 정말이지 꿀맛이었습니다. 하여, 나에게 열차는 단순히 열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느냐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차비부터 셈하며 쌈짓돈을 만지작거려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속도로 모든 걸 평가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차비가 얼마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호남선에도 복선이 깔리고 꿈의 고속열차시대가 열렸으니까요. 물론 고속열차 철도는 대전에 가야 끼어들 수 있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KTX가 호남선을 달리고 있으니 많이 변한 게 사실입니다.

호남선 임성역. 무궁화호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이다.
 호남선 임성역. 무궁화호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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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열차가 이번에 멈출 역은 몽탄, 몽탄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놓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나올 때마다 기차는 한 정거장씩 옮겨갑니다. 나주역을 통과한 열차가 고막원역과 함평역, 무안역을 거쳐 몽탄역에 이릅니다. 내가 내려야 할 역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각자 내려야 할 목적지에 가까워진 사람들은 알아서 눈을 뜹니다. 참 습관이라는 게 무섭습니다. 곤히 자다가도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오면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것처럼 눈이 떠지니 말입니다. 눈을 뜬 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두리번거리며 뒤통수를 매만집니다. 머리에 '새집'을 짓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나의 목적지를 알립니다. 광주역에서 출반한 지 1시간 10분만입니다. 습관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내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 열차를 타고 계속 가봐야 종착지인 목포역인데 방법이 없습니다. 목포역에서 열차를 바꿔 타고 마음 내키는 곳까지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나의 형편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몸만 내립니다. 마음은 그대로 열차 안에서 삶은 계란을 먹으며 여행할 수 있도록 놔두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열차여행이었지만 산보다도 더 큰 그리움으로 채색된 마음 넉넉한 시간이었습니다.

눈 내리는 임성역.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에 소재하고 있다.
 눈 내리는 임성역.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에 소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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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열차, #통근열차, #무궁화호,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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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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