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이었을까. 나는 '생명 윤리'라는 주제로 토론을 준비하며 김 할머니의 일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201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김 할머니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존엄사는 과연 합리적인 제도가 될 수 있을까. 국내에서 최초로 대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을 당시 존엄사를 찬성하는 입장이 반대하는 입장보다 우세했다. 대부분의 이유가 환자의 고통과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의사들 중에도 존엄사에 찬성하는 이들이 있었다. 내가 당시 대학병원을 찾아 인터뷰했던 외과 레지던트들도 "환자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존엄사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통해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환자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다. 대다수는 죽기 직전까지 온갖 호스를 몸에 꽂고 기계에 의지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이다. 호스를 몸에 꽂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어떤 이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 중에는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주위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만약 혼수상태에서도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비록 자신이 기계에 의지하여 생을 연장해는 삶도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삶일 수 있다. 조금이나마 주위 사람들의 음성을 더 듣고 싶은 것이 살아있는 환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중요한 것은 주변인의 시각이 아닌 환자의 시각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치료를 이어갈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는 환자가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가 급작스럽게 혼수상태에 빠지는 경우에는 환자의 의사를 반영할 방법이 없다. 이런 경우 외국에서는 환자가 그 동안 살아왔던 흔적을 통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한다고 한다. 이번 김 할머니 사건 역시 법원은 김 할머니의 가치관을 반영한 가족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생명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 '추정'이란 불확실한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음이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존엄사를 찬성하며 제시한 이유 중 하나가 가족들의 부담이다. 경제적인 이유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환자의 판단을 흐려서는 안 된다. 가령 자신은 희망을 갖고 좀더 치료를 받으며 생을 연장하고 싶지만, 가족들의 부담을 생각하여 치료를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치전도현상이 아닌가 싶다. 환자가 경제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다.
경제적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복지정책이 실시되어 환자가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싸워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길을 먼저 만드는 것은 타당한 방법이 아니다.
존엄사는 분명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이다. 항상 환자 자신의 순수한 가치관이 최우선시 되어야 하며 언제나 신중한 판단을 통하여 결정해야 한다.
인공호흡기를 떼는 순간 김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과연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김 할머니밖에 없다.
그저 그 눈물이 행복의 눈물이었기를 바라며 고인을 편하게 보내드리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의무인 듯 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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