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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산행을 자주 즐기지는 않지만 눈 내린 겨울산을 유난히 좋아합니다. 눈이 푹신하게 쌓인 산길을 걸을 때 들려오는 뽀드득 발소리는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닌 것 같고, 이 추위에도 짹짹 지저귀는 귀여운 산새들의 노랫소리는 어느 계절보다도 또렷하고 깊게 가슴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처음 마주하는 차갑고도 명징한 겨울 산바람은 오르느라 수고했다고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기도 하고, 지난 일들일랑 잊어 버리라며 복잡한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주어 좋습니다.     

 

태백산(太白山)의 한자 이름은 투박하고 거칠게 보이지만 우리말로 풀어보면 뜻이 멋있습니다. 세상을 크게 밝혀준다는 이 산의 이름은 눈 내린 겨울에 더욱 어울립니다. 우리 민족의 영험한 산, 신령이 깃든 산이라 불리기도 하니 백두산이나 한라산 같은 느낌도 들지만, 개미처럼 줄지어 오르는 조그만 인간에게 편안한 길을 내어주는 착하고 포용력 있는 거인 같은 산이랍니다. 산세가 완만하여 산행 초보자나 여성과 아이들도 그리 힘들이지 않고 즐겁게 오르게 해주니 산을 다 내려와서 태백산을 한 번 쳐다보면 무척 고맙고 친근하게 느껴지지요.  

 

착하고 포용력 있는 거인 같은 산

 

전 이상하게도 꼭 겨울에 태백산을 오르게 됩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눈 내린 겨울이면 생각이 나고 갈증이 나면 물을 찾듯이 태백산을 찾습니다. 아마도 겨울산이 생각날 때 누구든지 오라며 친절하게 길을 내어주고, 복잡하고 어두웠던 마음을 하얗게 밝혀주는 큰 산의 넉넉함이 잊히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눈처럼 흰 입김을 내뿜으며 산꼭대기 쪽으로 오를수록 태백산의 풍모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그 이름 같아서는 산세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멋진 기암절벽들이 그 기세를 뽐내며 우뚝 서 있어야 하는데도, 태백산은 그렇지가 않네요. 주변의 거친 산들을 품에 안듯이 바라보고 있고 동해바다 같은 파란 하늘을 묵묵히 비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꾼들이 태백산을 무욕의 겨울산, 침묵의 산이라고 하나 봅니다.

 

내린 눈이 쌓이고 얼어 산호초처럼 가지를 뻗은 눈꽃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저 앞에 보이는 것이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헷갈리게 하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걷자니 태백산이 열어준 하늘길을 향해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잰 1567m라는 산의 높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이 오르면 오를수록 몸으로 느껴지고 마음으로 감동하게 합니다.

 

산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천제단이 거친 칼바람에 동글동글해진 돌들로 이 높은 산에 쌓여 있습니다. 산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는 이 오래된 믿음은 종교를 떠나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은 신화 같기도 하고, 저 멀리 존재했던 아메리카 인디언이 우리와 한핏줄이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떠오르게 합니다. 

 

겉으로 보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기독교와 불교 신자인 것 같지만, 삶이 너무 무거워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 때는 누구나 무(巫) 신앙을 무의식적으로 찾습니다. 태백산이 처음 역사에 출현한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마음속 응어리를 푸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래되고 원초적인 신앙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이 제단은 1991년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도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면은 일상에서 벗어난 색다른 감흥을 주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심(巫心)를 느끼게도 합니다.

 

차디찬 겨울 산바람에 근심을 날려 버리고   

 

살아서 천 년, 죽어서도 천 년을 간다는 주목(朱木)과 천제단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 혹은 절을 하며 각자의 기원과 기도를 하네요. 누구는 소원을 빌고 어떤 이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그냥 천제단 정상의 저 너머에서 불어오는 겨울산의 차디찬 바람을 마주하였습니다. 

 

산밑의 저 작은 세상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속상해했던 일들로 뜨거웠던 머릿속이 찬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고 맑아졌습니다. 마치 하얀 지우개로 마음속의 얽히고설킨 전깃줄을 싹싹 지워버리는 느낌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망경사라는 절에서 솟아나는 차고 단맛 나는 샘물을 마셨더니 이젠 뱃속마저 깨끗히 비워졌네요.

 

영험한 태백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굳이 새벽같이 올라가 일출을 보는 산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태백산은 찾아오는 그 누구라도 마음속의 찌꺼기와 근심들을 겨울 산바람에 다 날려 보내준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ㅇ 태백산 입구 당골 광장에서 1월 31일까지 태백산 눈꽃축제도 한다니 때맞춰 간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ㅇ 스패츠(발 부위를 감싸서 눈이 신발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는 것)와 아이젠(눈 내린 산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것), 이 두 가지는 꼭 지참하세요. 


태그:#태백산, #겨울, #산행 ,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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