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케이터
지난 70~80년대는 역사상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이 가장 고조에 달했던 시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만큼 당시 젊은이들은 개인 문제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사회 변혁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몸을 던졌었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70~80년대의 반항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오늘날, 70~80년대 당시와 똑같은 문제의식을 품은 젊은이들을 만나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가 바로 한스 바인가르트너 감독의 <에듀케이터(The Edukators, 2005 국내개봉)>이다.
당시에 비해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너무 많이 가진 자들에 의해 없는 사람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보다 못한 젊은이들이 부조리한 세상을 교육하기 위해 교육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하지만 교육자들이 불시에 조우한 피교육자는 바로 자신들이 흠모의 대상으로 삼있던 68년 유럽혁명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 때 혁명을 꿈꾸던 젊은이에서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한 '하이덴베르그(극중인물)'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변명한다.
"모든 일이 천천히 진행돼서 알아채지 못했던 것뿐이야. 어느 날 낡은 차를 버리고 에어컨이 있는 좋은 차를 갖고 싶게 돼. 결혼해서 가족을 부양하게 되고, 집을 사고, 애들을 잘 키우고 싶어지지. 그런데 그게 다 돈이야.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침입해서 소파를 풀장에 던져놓은 것을 보게 되면 주저 없이 보수당에 한 표를 찍게 되는 거지."
교육자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맞는다. 세상을 교육하고 싶어 판을 벌렸지만, 지금은 납치범으로서 경찰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도피자로 전락해 먼저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체제 전복이라고 여기던 걸 이제 가게에서도 팔아. 체 게바라 티셔츠, 무정부주의 스티커…. 이제 더 이상 청년운동은 없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 비록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고의 이상과 이념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거지."
푸념 끝에 내 뱉는 '비록 더 이상 먹혀들지 않더라도 최고의 이상과 신념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그들의 다짐은 어쩐지 공허하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세운 현실의 장벽이 젊은이의 치기로 넘어서기에는 너무 견고하고 높았던 까닭이다.
비겁하고 탐욕스런 이 땅의 지식인들
행정수도 이전을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이나 서울 또는 수도권이 아무리 복잡하고 비대해져서 설사 땅을 파고 '지하에 대로를 건설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가지의 기능조차도 지방 분산은 "결사반대하겠다"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 같은 현 정권의 대표적인 기득권 옹호론자들이 박정희, 전두환 등 과거 독재자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공통점으로 "나도 한때는 민주투사..."라며 이력을 앞세우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보다도 철옹성 같은 기득권의 성을 쌓는 데 앞장서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30대 이전에 혁명을 꿈꾸지 못한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며, 30대 이후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뇌가 없는 사람이다"는 표현만큼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데 유용한 말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은 부당한 과정을 거쳐 이룩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20대의 정의감으로 혁명을 꿈꾸다, 철이 들면서는 사회와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사회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았고, 오늘날 누리는 것들이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도 한때는..." 같은 자기변명은 위장전입이나 위장 취업, 탈세 같은 부정한 수단마저 정당화시켜주는 면죄부가 아니다. 이 치졸한 변명은 단시 스스로의 변절 내지는 과거 이력을 단지 출세의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뻔뻔함에 대한 죄책감을 희석시켜 스스로의 낯 뜨거움만 면해보고자 하는 자위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의 천부당만부당한 변명이,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의 희생을 '이상주의자'라거나 '철이 없다'고 매도해 버리는 현실을 개탄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발전을 위해 겪는 진통에서 발생하는 희생을 "(사회 발전을 위해)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일이지만...."이라며 책임에서 발을 빼는 이 땅의 수많은 비겁한 지식인들을 나는 경멸한다. 아니 이 땅의 지식인들은 한 걸음 더 나가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기까지 하다.
애프터 '에듀케이터'(after 'The Edukators')
궁극적으로 역사는 길을 밝혀주는 선각자와 비쳐지는 길을 양심을 따라 걸어온 자들에 의해 견인되어 왔다. 신이 누군가에게 남들이 감히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부여했다고 치자. 그것이 자산이던 재능이던 간에 신은 그가 그것을 창고에 쌓아두고 썩혀버리라고 준 것은 아닐 것이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선진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대중을 계몽하여 변혁의 동력을 확보하는 한편, 권력자나 자산가들이 최소한의 사회적인 책무를 다 할 수 있도록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같은 규범을 제공하여 기득권층이 타락하지 않도록 수시로 경종을 울려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어떤 모습인가? '비록 먹혀들지 않을지라도 이상과 신념은 끝까지 남아있다.'며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X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봐야 아냐?"며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고 있지나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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