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신랑은 나에게 몇 가지를 약속했었다. 아이 갖지 말고 우리끼리 재미나게 살자, 제사 안 지내도 된다, 함께 귀농하자... 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이 모든 것이 허황된 약속이었음이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결혼 1년이 지난 후부터 아이를 강하게 원했고, 지금은 둘째 낳자고 조르고 있다. 귀농은 천천히 생각하자. 아니면 귀농할 시점에 우리 주말 부부하자며 귀농에 대한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한번씩 따져 물으면 "이제 다 잡아 놓은 물고기라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폭력성(?)이 발동하기도 한다.
잠과 싸워야하는 시댁 제사결혼 직후 8개월간 우린 주말 부부였다. 당시 시댁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 없이 시댁에 산다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물론 나뿐 아니라 시댁 어르신들도 남편 없이 지내는 나 때문에 신경 많이 쓰셨다. 시댁 생활은 1년 반 정도 했는데 불편하긴 했지만 함께 산 기간 덕분에 어른들과 서먹함 없이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는 장점은 있는 것 같다.
결혼 후 나를 제일 힘들게 한 건 단연 '제사'였다. 신랑은 결혼 전 자기가 결혼만 하면 있던 제사 모두 절에 올리기로 했다며 걱정할 필요없다고 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내가 책임지고 제사에 신경쓰지 않도록 막아주겠다고 했다. 어머닌 자기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분이라며….
결혼하고 나니 신랑의 말은 말도 안 되는 '뻥'이었다. 시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아직 살아계셔서 어떤 결정도 시부모님들이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혼자 제사 준비하시는 데 내가 가만히 있는 건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제사가 제일 힘든 건 음식 준비가 아니었다. 나는 원래 밤잠이 매우 많은 편이다. 적어도 밤 11시에는 잠이 드는데, 제사가 있는 날은 새벽 3시쯤에나 잠자리에 들 수 있다. 결혼 첫 해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음을 조상님들께 인사드려야 한다며, 거의 모든 제사에 다 참석했다. 신랑 외가쪽 제사까지….
당시 신랑 없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과 지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음식을 다한 후 한복으로 갈아입고 새색시처럼 얌전히 앉아 밤 12시까지 기다리는 건 정말이지 힘들었다. 어른들 대화에 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쏟아지는 잠을 참아내느라 허벅지를 꼬집곤했다. 제사가 있는 날엔 커피를 얼마나 마셨댔던지….
시댁의 제사 풍습은 조금 까다로운 편이었다. 일단 밤 12시가 되어야 메(밥)를 짓는다. 12시가 되면 가장 큰 어른이 "메 지어라"라고 하시면 제상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문도 낭독하고 제주들이 돌아가면서 잔을 치고, 유식이라는 조상님께 식사를 권하는 의식도 한다. 유식 때는 한 5~7분 정도 엎드린 채 기다리신다.
이렇게 제사를 모시고 다 같이 밥을 먹고 정리하다 보면 새벽 2시가 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집에 도착하면 거의 3시…. 다음날 출근하면 비몽사몽이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조상님 기일이 겨울에 보름 상간, 또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참석해야 할 제사는 명절 차례를 제하고 6개가 된다. 뭐, 몇 개 안 되네 할 수 있겠지만, 결혼 전 약속을 따진다면 엄청난 숫자로 다가왔다.
그래도 결혼 초에는 제사가 있는 날 휴가를 쓰지 않아도 됐다. 숙모님들과 어머니께서 배려해 주셨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제사 준비 분위기가 바뀌었다. 도와주시던 숙모님들이 빠지시고 어머니 혼자서 준비하시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음식을 어머니 혼자 하기엔 힘들기에 나도 결국 휴가를 써야 했다. 물론 어머닌 휴가 내지 말라고 하신다.
남자의 조상 모시기에 휴가는 여자가 내야하는 제사 문화지난 주말에도 제사가 있었다. 다행히 날짜가 잘 빠져 이번 제사는 토요일이었다. 휴가를 쓰고 딸을 봐가면서 어머니랑 나랑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시골에 가서 제의 절차에 따라 모시고 돌아와서 누우니 역시 새벽 3시가 다 되어 갔다.
새벽에 자리에 누으면서 이걸 앞으로도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자려는 신랑을 붙잡고 난 또 한소리를 했다. "자기집안 제사에 휴가내지 않아도 되고…. 출근해서 좋겠다"고…. 착한 신랑은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사과하는 신랑에게 또 할 말을 잃고 잠자리에 들었다.
제사 풍습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한 데 모이게 해주는 매개의 역할도 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추억할 수 있는 의미있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 제사가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밤 12시를 고집하시는 시댁 어른들의 모습, 그리고 어떤 때는 다른 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채 우리끼리 제사를 모실 때도 있지 않은가?
이른 시간에 모시는 집도, 가족들 모이기 편하라고 주말에 모시기도 하고, 제사를 합치는 경우도 많던데, 우리 시댁은 이 부분만큼은 쉽게 양보하지 않으신다. 절차와 형식에 맞추어 제를 모셔야 조상님이 알아주고, 정성을 다해 조상을 모시면 자식들이 잘 된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정성은 마음에서 오는 것인데, 몸이 이렇게 고되서야 정성을 쏟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닌 얼마 전 교통사고로 허리가 좋지 않으신데도, 준비하는 게 재밌으시다며 세뇌시키듯 말씀하셨다. 정말 우리 시어머니 대단하시다.
시댁 집안 분위기가 남자들도 잘 도와주는 분위기이긴 한데, 결국 제사 준비에서 고된 일은 여자들이 맡는다. 같은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신랑은 출근할 수 있지만, 결국 난 휴가를 써야 하지 않는가? 건방지게 따지고 보면 나의 직계 조상도 아닌데 말이다.
곧 있으면 설이고, 설 전에 제사가 하나 더 있다. 이때도 나는 우리 신랑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될 것이고, 우리 신랑은 또 미안하다고 하겠지? 즐겁게 지내는 제사를 맞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도 어머니처럼 세뇌시켜야지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