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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는 나이를 먹게 되고 백발의 노인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간다.
 우리는 언젠가는 나이를 먹게 되고 백발의 노인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간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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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된다. 나도 그렇게 아빠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갈수록 아빠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아빠 노릇은 물론 아빠, 아니 아버지 되기가 쉽지 않다. 자식이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 '아버지'는 되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아버지가 되기는 정말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은 돈이 없으면 아빠 노릇 하기도 어렵다. 아빠의 능력이 돈으로 결정되기까지 하는 슬픈 현실이지만 현실이 그런 걸 원망만은 할 수 없다.

친구 녀석이 암에 걸렸습니다

얼마 전에 암에 걸린 친구와 만나 이야길 나눴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치료 받느라 없는 머리털도 더 빠져 있었다. 그 친구는 이야기 중에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자식이 너무 어리기 때문이란다. 다른 친구들의 자식들은 고등학교 들어가고 대학에 간 친구도 있지만 이 친구는 이제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야! 내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가장 생각나는 게 뭔지 아냐. 어린 자식들이야. 저 어린 것들을 놔두고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게 젤 걱정이 되는 거야. 나보다 자식들이 더 들어오는 거야."
"그게 아버지야. 자식 이제 철들어가네."
"임마, 그럼 언젠 내가 아버지 아니었냐."

내 농담에 친구는 역정 아닌 역정을 내는 시늉을 했지만 나 또한 몸이 아플 때면 이제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인 자식들이 먼저 걱정이 되었다. 애들 엄마라도 경제적 능력이 있다면 마음의 짐이 덜하겠지만 요즘처럼 돈이 자식들의 학력을 좌우하고 그들의 인생을 결정하는 시대에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무책임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는 말이지만 마누라는 어떻게든 살아가지. 새 남자 만나서 잘 살 수도 있고 말야. 근데 자식은 안 그래. 돈이라도 많이 벌어놓고 죽으면 괜찮겠지만 평생 노가다로 살아온 내가 물려줄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안 죽으면 되잖아. 니 자식들 클 때까진 안 죽을 테니 걱정마라."
"그려, 죽으면 안 되지. 학교 공부라도 마치게 해놓고 죽더라도 죽어야지. 그니까 니놈도 몸 조심혀라. 만날 골골 하지 말고."
"짜식, 쥐가 고양이 생각하고 있네. 임마 내 걱정 붙들어 매고 니나 걱정해. 그렇게 일만 죽도록 하지 말고 애들 데리고 여행도 하고 극장도 가고 그래라. 인생 뭐 볼 일 있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하냐. 그놈의 철근 나르는 일 지겹지도 않냐."

미래의 내 모습이고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
 미래의 내 모습이고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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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리니까 딸들이 날 피하는 것 같아

친구의 학력은 중졸이 전부다. 중졸이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해 아는 게 많았다. 특히 음악엔 일가견이 있어 친구들을 만나면 가르치곤 했다. 그런 그는 평생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곤 근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전문가 수준이 되었다. 철근 구조물 일에 전문가가 되어 아파트나 대형 건물의 일부를 도급 맡아 일을 했다. 담배도 안 피웠고 술도 안 마셨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고 늦장가를 갔다. 어엿하게 제법 큰 평수의 아파트도 장만했다. 보기만 해도 예쁜 두 딸도 낳았다. 친구는 가끔 통화를 할 때마다 '야! 나 딸들 보는 재미로 산다. 흐흐흐.'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곤 했다. 그러던 놈이 덜컥 암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도 해봤단다.

"야, 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 떠나와서 겨우 중학교 마쳤다. 너도 알다시피 네가 안  해본 게 없다. 공사판 막노동은 기본이고 광장에서 일까지… 결혼해서도 동료들이 술 한 잔 하자고 해도 안 하고 일 끝나면 집이었다."
"그래, 니 열심히 살았다. 다 알지. 근데 니 병은 너무 열심히 살았던 게 문제였어. 너 그거 아냐."

"모르겠다. 근데 몸이 아프고 머리털 빠지니까 '아빠! 아빠!' 하던 딸네미들이 날 멀리 하더라. 네 모습이 이상했나 봐. 처음엔 서운하기도 했지만 애들이 무슨 생각이 있겠니. 한편으론 뭘 위해 살아야 하나 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왜?"
"하루는 약 기운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는데 우리 큰 딸네미가 내 손을 잡고 기도하고 있는 거야. '하느님! 우리 아빠 병 낫게 해주세요. 안 아프게 해주세요. 밥도 잘 먹게 해주세요.' 하고 말야. 그때 내가 생각한 게 뭐였는지 아냐. '그래 아빠 꼭 나아서 너희들 클 때까지 지켜주마.' 그거였다. 서운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야."

"부모야 다 그렇지. 자식의 한 마디에 웃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나도 그럴 때 많아. 아마 세상 부모들 다 그러겠지."
"사실이지 집에서 내 자리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애들은 엄마가 늘 함께 있으면서 공부시키고 놀아주고 다 하잖아. 근데 난 새벽 일찍 일나가고 들어오면 티비나 보거나 잠을 자고 그랬다. 어쩌다 애들 데리고 집 가까운 공원 가는 게 애들과 함께 하는 전부였다. 헛 산거지."

"자식, 헛 살긴. 다 그렇게 살아. 그래서 이 나라의 아버지들은 불쌍하다고 하잖아. 단순히 돈 벌어다주는 기계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애들은 다 안다. 우리 아빠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말만 안 할 뿐야."
"그렇겠지. 다 알겠지."

친구의 '그렇겠지. 다 알겠지.'란 말에 겉대꾸는 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그래 다 알 거다'란 말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편으론 '알긴 뭘 알아. 나도 너도 몰랐는데'하고 중얼거렸다.

1년에 한 번 정도 보는 할아버지. 난 이분을 볼 때마다 짚신을 삼고 망태기를 엮던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1년에 한 번 정도 보는 할아버지. 난 이분을 볼 때마다 짚신을 삼고 망태기를 엮던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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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난 아직도 아버지가 되어서도 내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 팔십을 훌쩍 넘긴 아버지가 힘없는 눈동자로 누워계시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아버지, 어디 아프세요?'이다. 괜찮다고 대답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아 버린다. 그런 내가 내 어린 자식에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한다면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하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마 친구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모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말은 안 해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내 아버지도 그럴 것이다. 내가, 친구가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쓰고 나서 난 아들놈을 부를 생각이다. 한바탕 뒹굴기 위해서다. 요즘 난 아들놈과 함께 뒹굴고 넘어지며 장난치길 즐겨하고 있다. 그러는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다. 녀석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아마 몸을 맞대고 뒹굴며 장난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아직 아빠와 놀기 좋아하는 때에 열심히 놀자 하는 생각도 들어있다. 그런 한편으론 아빠의 작은 마음, 이것이 아빠야 하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한 켠에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태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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