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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연이 곧 숙명'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 인생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과 현상을 피하기보다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숙명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까요.

저의 아프리카 여행(2009년 1~3월)도 참 우연히 찾아왔고 아프리카에서의 모든 일정도 순전히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연히 떠난 미지의 땅 아프리카

사실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를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누구나 그 원형에 대한 그리움은 본능이니까요.
 사실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를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누구나 그 원형에 대한 그리움은 본능이니까요.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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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저와 막역한 사이인 타우(Tau)가 저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불쑥 한마디 던졌습니다.

"아프리카 가지 않으실래요?"

기업의 CEO인 그는 이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이하 '조벅'으로 약함. 현지에서는 모두 조하네스버그로 발음하며 조벅Jo' Burg으로 줄여서 사용합니다)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고 2주 뒤에 회사 직원 두 사람이 출장을 가게 되었으니 함께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세 달쯤 그곳에 머물게 될 테고 어차피 5성급 호텔의 펜트 하우스를 빌리게 됩니다. 선생님의 왕복 항공권은 제 마일리지를 사용하면 되고 호텔은 방이 여러 개인 펜트 하우스이므로 선생님께도 독립적이고 안락한 공간이 제공될 수 있습니다. 직원들은 어차피 사무실에서 주된 업무가 진행되므로 그 호텔은 잠시 눈만 붙이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50여 평쯤의 펜트 하우스를 제 혼자 독점하다 시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모티프원에서 일어나는 사람간의 문화적 교류를 지극히 사랑하는 타우이지만 노동 강도가 적지 않은 이 현장에서 격리되어 한동안 한적함을 만끽하고 오라는 배려였습니다.

저는 2주 뒤에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사실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를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그 먼 고향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늘 안쓰러운 소식들이 주로였습니다. 사막과 질병, 가뭄과 기근, 부패와 악정, 식민과 내전의 딱한 사정들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비행기 속에서 결심했습니다. 그곳에서 비관 대신 낙관을, 절망 대신 희망을, 불행 대신 행복을 찾아보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물질적 풍요가 채워주지 못한 우리의 공허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는지를 그곳에서 발견하고자했습니다.

아프리카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야생동물보호구역인 크루거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에서 마주친 야생의 코끼리. 아프리카는 '날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 갇히지 않은 동물을 만난다는 것은 익히지 않은 음식을 대하는 것처럼 생소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깨어나게 하고 문명이전의 원형질에 가까운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프리카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야생동물보호구역인 크루거국립공원Kruger National Park에서 마주친 야생의 코끼리. 아프리카는 '날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 갇히지 않은 동물을 만난다는 것은 익히지 않은 음식을 대하는 것처럼 생소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깨어나게 하고 문명이전의 원형질에 가까운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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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습니다. 모든 백인들은 자신의 집에 성처럼 높은 담을 쌓고 또다시 그 위에 전기 펜스를 두르고 코너마다 감시 카메라를 달고서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그 누구도 거리를 걷는 자가 없었습니다. 집이나 사무실 밖을 나올 때는 으레 차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멋진 스포츠카를 가지고 조벅국제공항(O. R. Tambo국제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남아공 기업의 대표인 티안(Tian)은 도심으로 향하는 고속화도로에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멀리 보이는 빌딩군을 향해 말했습니다.

"CBD입니다."

저는 티안의 이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며칠 뒤 티안의 손가락이 가리킨 그곳을 가보고야 알았습니다. 상업과 금융 그리고 관공서가 집중되어 활기로 가득해야 할 그 중심업무지구인 조벅의 CBD(Central Business District)는 완전히 슬럼화되어 백인들이 모두 떠난 흑인들이 재탈환한 점령지 같았습니다. 다음날 티안은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친구가 흑인의 저격을 받고 어떻게 절명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호텔에만 갇혀있다가 결국 지겨워진 나머지 보름쯤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타우의 예상과는 달리 저는 조벅의 안전지대에서 머물며 아프리카를 어떻게 요리해야할지를 궁리했습니다.

CBD에서 출발하는 남아공 도심간을 연결하는 고속버스가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하여 여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안전하게 한국으로 되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의 초청자들에게도 너무 큰 부담을 안기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조벅에서 프레토리아, 케이프타운, 그리고 더반과 포트엘리자베스 등의 정해진 구간을 왕복하는 독립여행자들을 위한 바즈버스(BAZ BUS)가 운행되긴 하지만 나라와 도시가 국한된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차를 렌트해서 원하는 곳곳을 탐방하는 이상적인 방법이 있긴 하지만 비용과 안전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결국 구미 각국의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오버랜드 트럭(Overland Truck) 투어를 택했습니다. 개조된 트럭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여행자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보석 같은 곳을 탐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크게 신뢰받고 있는 노매드어드벤처투어스(Nomad Adventure Tours)의 부사장인 로렌(Loren)과 접촉하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20일 일정의 두 프로그램과 2일간의 이동수단을 이용해서 남부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환상(環狀)으로 연결하는 일정을 확정지었습니다.

도둑 신고나온 경찰 "브루스 리랑 무슨 관계요?"

아프리카의 여러 어드벤쳐드럭투어회사중의 하나인 노매드어드벤쳐투어스Nomad Adventure Tours의 엠블럼. 아프리카는 험한 자연환경 때문에 개조된 트럭이 여행자의 이동수단으로 주로 활용됩니다.
 아프리카의 여러 어드벤쳐드럭투어회사중의 하나인 노매드어드벤쳐투어스Nomad Adventure Tours의 엠블럼. 아프리카는 험한 자연환경 때문에 개조된 트럭이 여행자의 이동수단으로 주로 활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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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 프로그램인 사우스 아프리카 익스플로러(South African Explorer)는 조벅에서 케이프타운까지 탐험하게 되는 20일간의 일정입니다. 아프리카 최초의 야생국립공원이 크루거내셔널파크, 남아공 속의 또 다른 소왕국 스와질랜드와 레소토를 경유하는 매력적인 루터였지요.

유럽 각국에서 온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좁은 트럭에서 20일을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로렌은 장기여행을 하는 저의 입장을 고려하여 숙소는 별장 같은 롯지(lodge)를 혼자 이용하는 것으로 배려해주었습니다.

지옥 같은 일정과 꿈결 같은 교우의 19일이 지났습니다. 우리 일행은 마지막 날 밤을 그림 같은 남아공의 와인루트를 돌고 스텔란보쉬(Stellenbosch)의 스피어(Spier)와인 시음장에서 350년이 넘는 남아공의 유구한 와인의 역사를 훑었습니다. 몇 가지 종류의 와인을 시음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 우리는 이 마을이 가장 고급한 레스토랑 모요(Moyo, 줄루족말로 'heart'를 의미합니다)에서 게임스테이크(야생동물 스테이크) 뷔페로 마지막 밤의 향연을 끝냈습니다.

도난사고가 발생한 남아공 와인루터상의 스텔란보쉬Stellenbosch에 있는 카티지cottage에서 바라본 포도밭.
 도난사고가 발생한 남아공 와인루터상의 스텔란보쉬Stellenbosch에 있는 카티지cottage에서 바라본 포도밭.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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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는 온통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넝쿨이 발코니를 덮고 있는 카티지(cottage)였습니다. 방 이름도 피노타지(Pinotage), 컬터바(Cultivar), 네비올로(Nebiolo), 멜롯(Merlot) 등 포도품종을 인용했습니다. 4960Km를 무사히 달려온 것에 감사하며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온통 백색의 침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새벽 4시에 창문에서 나는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더위 때문에 반쯤 열어 놓은 낮은 창문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손을 넣고 있었습니다. 저는 놀라 소리쳤습니다.

"누구냐!"
"시큐러티(security, 보안요원)이다. 창문을 확실하게 잠그고 자도록 해라."

그는 어둠 속에서 창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잠든 저를 질책하고 포도넝쿨로 덮인 파티오(patio)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고 보니 또 다른 여자가 멀리 그 남자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에 사단이 난 것을 아침 식당에서 알았습니다. 엘레믹(Ellemiek)이 퉁퉁 부은 눈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제 지갑과 카메라를 도둑맞았어요. 지금까지 찍은 사진과 저의 신용카드, 현금이 몽땅 사라졌어요. 흑흑……."

롯지 주인은 지난밤에 보안요원이 순찰을 돌지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제 방의 창문을 열려고 했던 그 검은 그림자가 기어코 다른 방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아침 식사시간에 엘레믹의 도난 소식을 알리는 마를린
 아침 식사시간에 엘레믹의 도난 소식을 알리는 마를린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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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나타난 것은 우리가 신고를 한 지 3시간쯤 후였습니다. 우리는 달팽이의 움직임보다도 더 느린 남아공의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고 침울한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줄곧 울먹이는 엘레믹을 두고 우리끼리 즐거운 수다를 즐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기다림 동안 전화로 카드의 도난신고를 하고 비상조치를 마치자 엘레믹이 울음을 그쳤습니다.

경찰이 나타난 것은 우리가 신고를 한 지 3시간쯤 후였습니다. 우리는 달팽이의 움직임보다도 더 느린 남아공의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고 침울한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경찰이 나타난 것은 우리가 신고를 한 지 3시간쯤 후였습니다. 우리는 달팽이의 움직임보다도 더 느린 남아공의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고 침울한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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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만에 나타난 두 명의 경찰도 도둑을 잡겠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엘레믹을 의심했습니다. 혹 거짓신고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도둑을 맞을 뻔했다는 증언을 하고 확인서를 작성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접수했습니다. 저의 증언 중에도 그 경찰은 제가 브루스 리(Bruce Lee, 이소룡)의 가문이 아닌지, 혹은 재키 찬(Jackie Chan, 성룡)을 아는지, 무술을 할 수 있는지, 쌀을 어떻게 해서 먹는지에 더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엘레믹은 이미 잃어버린 물건들을 회수할 기대보다 경찰의 '도난 증명서'를 받아 여행자보험으로 카메라 값이라도 보상받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도난 사고가 났다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긴 카티지의 주인과 결탁한 경찰은 인색한 수사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 마를린의 마음

사건이 접수되는 그 지루한 기다림 동안 제게 마를린(Marleen)이 다가왔습니다. 케이프타운에서 1년간의 인턴십을 마치고 이 여행에 합류한 23살 네덜란드 처녀였습니다. 그녀의 2살 위 언니 올린(Jolien)과 함께였습니다. 의사인 언니와는 달리 마를린은 여행 기간 내내 조신하지 못한 행위로 저의 눈총을 받고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차가 멈추기라도 하면 도로 위에 벌러덩 드러눕고, 좀 걸어야할 거리에서는 낙오되고, 물가에서는 훌러덩 맨몸을 드러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녀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리 아저씨, 이 단어들을 한국어로 좀 적어주세요."

그녀의 쪽지에는 세 단어가 있었습니다.

'Relief, Hope, Love'

Believe Hope Love의 한국어를 알고 싶어했던 마를린.
 Believe Hope Love의 한국어를 알고 싶어했던 마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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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갑자기 그녀가 대견스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앉히고 사건이 종료되는 시간까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1년 반 전에 저의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의 인턴을 자처했어요. 이제는 어느 정도 엄마를 잃은 슬픔이 누그러졌답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이승을 떠날 때까지 추구해야할 가장 가치로운 것이 아닌가.

저는 케이프타운의 트럭에서 내리며 마를린의 어깨를 툭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녀도 엄지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부디 마를린이 '믿음'을 잃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 세상의 풍파를 이겨가라는 제 나름의 격려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산소통4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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