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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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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항구의 배마다 출항준비로 분주했다. 출항준비를 거반 마친 배들과 잡은 물고기를 담을 레고 블록을 닮은 컨테이너 박스들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음, '텅 빈 충만'의 진리를 여기서도 본다. 진리라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아주 간단명료한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별개의 것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면 '진리'라고 여기지도 않았을 터이고, 그 반열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소박하게 느껴지는 간판, 그냥 정겹다.
▲ 제주의 가게 간판 소박하게 느껴지는 간판, 그냥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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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항 근처에는 '부두상회'와 '태영선구'라는 간판이 달린 가게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계글자가 아닌 수작업을 한 간판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기계로 디자인된 글씨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라면서도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만들어질 수 없는 간판은 오히려 정감이 넘쳐 보인다.

성형미인이 판을 치는 세상,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관심사는 "예쁘냐?"라는 것에 있단다. 사실 나도 그렇다. 이야기 속에 여자가 등장을 하면 기어코 "그 여자 예쁘냐?"하는 질문은 누군가라도 하게 된다. 드라마나 연극 혹은 영화의 여주인공들, 만일 그들이 예쁘지 않았어도 그 드라마와 연극 혹은 영화가 흥행할 수 있었을까?

선남선녀가 애틋한 사랑싸움을 할 때와 추남추녀가 애틋한 사랑을 할 때, 당사자들이야 사랑에 눈이 멀어 온통 아름답겠지만 보는 이들은 선남선녀의 사랑만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판 미인의 기준, 모두가 거기에 맞추다 보니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을 그가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이런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그 촌스러운 간판이 오히려 신선해 보인 것이다.

한림항에서 바라본 바다와 마을
▲ 한림 한림항에서 바라본 바다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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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길, 한 번 달려보고 싶지 않은가?
▲ 가장 멋진 길? 이런 길, 한 번 달려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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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안에 세워진 솟대
▲ 솟대와 갈매기 제주 해안에 세워진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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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항에서 공항 쪽으로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빨강 애마를 몰았다. 방파제가 길게 이어진 바다로 하얀 차가 질주를 한다. 바다로 난 길을 달리는 차는 마치 바다를 달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저렇게 멋진 길은 많이 없을 것같다.

나는 종종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말을 한다. 내가 그 단어를 사용할 때 '가장'이라는 수식어는 '최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세상에서 단 하나가 아닌 것은 없다. 그 많은 수십억 사람 중 그 누구도 같은 사람 없듯이, 같은 꽃, 같은 나무라도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들인 것이다.

특별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아주 특별함에도 그 특별함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기왕이면 자신이 이 세상에 하나 뿐인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긍정적인 삶을 살고, 이웃에게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솟대와 갈매기, 제주의 풍광과 잘 어울린다.
▲ 솟대 솟대와 갈매기, 제주의 풍광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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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검은 화산석 바위 곳곳에 솟대가 서 있다. 방사탑과 더불어 바다에 세워진 솟대의 의미는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주의 바다와 잘 어울리는 조형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종달리와는 반대편이긴 하지만 제주도에 살면서 단 한번도 이곳은 와보질 못한 것 같다. 허긴, 구석구석 다 다녀봤다고 생각했지만 가보지 않은 곳이 얼마나 많은가? 신비의 섬 제주도, 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에 6년은 너무 짧은 기간이었던 것이다.

귀덕리에 있는 집
▲ 제주의 집 귀덕리에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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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등대, 모두가 그 집의 정원이 아닌가!
▲ 귀덕리의 민가 바다와 등대, 모두가 그 집의 정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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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 귀덕리 그 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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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주도로로 나왔다가 귀덕리로 들어섰다. 좁은 마을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는 집을 만났다. 바다와 가까이 접한 집들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바다와 맞닿아 있는 집은 본 적이 없었다. 방바닥에 누워있으면 파도치는 소리가 자글자글 들려올 것만 같은 집, 세상에서 이렇게 넓은 연못(?)을 가진 집이 또 있을까?

별장 같은 현대식 건물이었다면 흉물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집은 그야말로 서민, 서민 중에서도 땅조차도 변변히 차지할 수 없어 해안가 바닷가의 화산석을 반석 삼아 집을 지은 이들인 것이다. 혹시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인가 해서 마당을 들여다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이런저런 어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 김민수

빨강 애마를 돌려줄 시간이 다가왔다. 하귀해안도로를 따라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첫날 빨강 애마와 달렸던 그 길이다. 제주여행의 마지막 길에 처음 갔던 그 곳이 또 마지막 길이 된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인 듯하다.

김포행 비행기 창밖으로 제주의 풍광이 보이는가 싶더니만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이어 남해의 섬이 올망졸망 들어온다. 광주 상공이라는 기장에 말에 창밖을 보니 육지는 아직도 백설의 세상이다. 서울이 가까워지면서 회색의 운해가 펼쳐진다.

공항에 내리니 제주의 따스한 바람은 어디로 가고, 육지 특유의 추위가 몰려온다.
이번 제주여행은 사실상 현재의 일터에서 마지막 출장을 겸한 여행이었다. 여행기를 쓰기 전 마지막 출장보고서를 작성했다. 평상시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최악의 글이었다. 마지막 출장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는 사무실에서 책상을 뺐다. 시원섭섭했지만, 더 좋은 일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현실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향했다.

사나흘간의 혹독한 감기몸살을 앓아가며 제주여행기에 매달렸다.
아직도 내 몸에는 감기기운이 남아있다.

이제 더 길어지면 읽는 이들도 지루할 것이고, 여행의 기운이 다 떨어져 글 쓰는 이도 고역이 될 것 같다. (끝)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제주여행기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에 아픈 일들이 많은데 유유자적 여행을 떠나고, 여행기를 쓰는 동안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태그:#제주도, #귀덕리, #한림,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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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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