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아이들을 대학 보내고, 가사에 힘을 보태려면 제가 지금이라도 대학에 다녀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꿈같은 이야기가 됐어요. 우리 가족의 내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요."
평소 가깝게 지내는 베트남 출신의 한 국제결혼 여성이 얼마 전 대학 진학이 좌절된 뒤 내게 푸념 조로 말했다.
고국에 있을 때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했던 그녀는 2000년 아르바이트로 베트남어를 가르치던 한 한국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착하고, 성실한 데다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에 이끌려 그녀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재 그녀의 나이는 29세, 남편은 48세. 딸아이(8)와 아들(6)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인 12년 뒤 남편은 환갑줄에 들어설 정도로 적지 않은 나이차다. 그때가 오면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인 그녀가 돈 벌어 식구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마음이 다급해진 이유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중단했던 대학 공부를 계속하고, 자격증이라도 부지런히 따놓고 싶었단다. 그래야만 어린아이들과 가족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는 집에서 가까운 수도권의 한 대학 문을 두드렸다. 대학 당국은 그녀에게 학창 시절의 모든 성적증명서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가 졸업할 당시 초등학교엔 컴퓨터 시설이 없어 졸업생의 성적증명서를 따로 보관해둘 형편이 못 됐다. 한국의 대학 관계자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호소했지만 대안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두에 베트남 출신 엄마의 문제를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이유는 그것이 그녀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서다.
나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지금의 한국인 남편을 만나 1997년에 결혼했다. 결혼 전 일본에서 나는 7년 넘게 의류 디자이너로 일했다.
한국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한국어에 익숙해질 즈음인 2년 전 나는 '학점은행제'의 문을 두드렸다(학점은행제도는 고교 졸업자가 정규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전문대학 졸업 혹은 4년제 일반대학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평생교육제도다). 희망자는 시·도 교육청이나 한국교육개발원 학점은행운영본부에 입학을 신청하고, 여기서 취득한 학점을 취업 또는 편입학 등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초등학교 성적증명서를 첨부하지 못해 끝내 그 꿈을 접었다. 내가 졸업한 일본의 초등학교는 졸업 20년이 된 성적표는 자동 폐기한 탓에 아예 증빙서류를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베트남 여성처럼 상당수의 다문화 가정은 부부간에 나이 차가 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많은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가정 경제를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 남편이 경제활동을 계속하더라도 사교육 천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면 여성들이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평소 알고 지내는 국제결혼 여성 중엔 모국에서 전문교육을 받았거나, 국가 자격증을 얻어 전문직종에서 일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 대부분이 한국에서도 통하는 경쟁력을 갖췄지만 제대로 대우를 받자면 학위나 자격증을 새로 취득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조차 불합리한 제도적 장애물에 걸려 번번이 좌절된다. 결국 이들은 그런 학벌이나 자격증이 필요 없는 생산직과 같은 단순 노동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커다란 손실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아는 한 일본인 여성은 아예 한국 가족과 떨어져서 일본에서 간호사로 일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자격증 취득을 아예 포기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문화 가정은 여러모로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언어, 피부색, 경제력, 인맥, 사회적 편견 등에서 제약을 받는다.
그나마 모국에서 학위를 땄거나 전문 기술을 익혀 한국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도 학력 증명이라는 한국 교육당국의 엄격한 벽에 가로막혀 좌절해선 곤란하다. 물론 학력 인증 기준에 따라 따질 일은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관련 증빙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는 2008년 '다문화 가족 지원법'을 시행하면서 한국어 교육과 상담, 돌봄 사업 등 각종 지원사업을 펼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들이 그들의 개성과 재능을 한국에서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들이 사회의 지원만 받는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한국 사회에 기여할 주체로 거듭나지 않을까? 또 평등한 자녀 교육 기회를 얻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게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NEWS WEEK 한국판 914호 (2010.01.27)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