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서브프라임론 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가 지난 1년간의 경기하락을 마감하고 회복세로 진입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경제는 원유, 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 하락과 금융시장 불안으로 국내총생산(GDP)이 -8% 이상 하락하는 등 극심한 경기침체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유가가 배럴당 80달러대를 회복하고, 막대한 재정지출과 공격적인 금리인하와 같은 경기부양책이 효과를 보임에 따라 2009년 4분기부터는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2010년 러시아 경제성장률은 3% 이상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러시아 최대 수출품인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경기회복의 원동력인 오일달러가 재유입되고 있으며 외환시장도 안정세를 되찾고 있다. 러시아 주가지수인 RTS지수는 지난해 127% 급등하며 글로벌 위기 이후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고, 외환보유고도 440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고질병이었던 높은 물가상승률도 한 자리수로 억제됨에 따라 러시아 중앙은행은 추가 금리인하도 고려하고 있다. 이에 국내외 기관에서는 러시아 증시가 펀더멘털 측면에서 여전히 저평가되어 있으며 지난해의 상승세를 올해에도 이어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주식시장의 상승이 곧 경기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위기 이후 구제금융과 막대한 재정지출로 인한 과잉유동성이 실물부문보다는 자산부문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8% 이상 위축된 실물경제와 신용경색에도 불구하고 급등한 러시아 주식시장이 또 다른 버블을 낳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가격 상승이 경기회복을 주도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에너지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명 러시아 경제가 단기간 내에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 위기에서 보았듯이 외부충격에 취약한 러시아 경제의 약점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향후 에너지 가격과 수요변화에 러시아 경제 전체가 좌우될 수 있는 위험이 커진 것이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앞장서서 러시아 산업다변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부 경제지표가 개선되고 자산가격이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를 짓누르는 불안요인이 상존하고 있다. 소매판매, 자동차 소비 등 내수시장은 여전히 침체되어 있고, 신용경색과 부실자산 증가 문제는 경기회복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막대한 기업부채 역시 러시아 경제의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유럽 최대 자동차 시장이 될 거라던 예상 뒤짚고 다시 변방으로지난해 소매판매의 감소세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어 러시아 소비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년에 비해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극심한 실물경기 침체 가운데서도 9%에 가까운 물가상승률은 소비자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독일을 앞지르며 유럽 최대 자동차 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되던 러시아 자동차 시장은 지난해 판매량이 -50% 이상 감소하며 다시금 자동차 시장의 변방으로 가라앉았다.
판매급감과 천문학적인 부채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러시아 최대 자동차업체인 아브토바즈(AvtoVAZ)가 지난해 말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18억7000만 달러의 구제금융 덕에 겨우 파산위기를 모면했지만, 인력감축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예상된다. 러시아 정부가 수입관세 인상, 자동차구매 보조금 지원제도 시행 등 각종 지원책을 펼치고 있으며, 2010년 1월부터 시행될 중고차 폐차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시장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금융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권의 경영악화와 그에 따른 대출 축소 역시 러시아 경제를 어렵게 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은행들은 러시아 당국이 각종 구제책과 금리인하로 대출을 독려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대출을 기피하고 있다. 오히려 금융위기 때 중앙은행으로부터 빌린 대출자금 상환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금융위기 이후 러시아 은행권은 예대마진 감소에 따른 수익성 악화와 부실자산 증가 등 자산건전성 악화로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의 경영악화는 실물경제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어, 은행권의 동맥경화 현상이 해소되지 않고서는 러시아 경제가 정상화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기업 및 가계부문의 대출상환 능력이 급감해 대손충당금 적립도 급증하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최소 15%가 넘는 금리를 지불해야만 외부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데, 러시아 은행들은 여기에 위험프리미엄을 더하여 적어도 18~20%의 금리로 대출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실적이 악화되고 가계소득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고금리로 대출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결국 차입금리가 대출금리보다 높은 역마진에 걸린 상황에서 러시아 은행들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기존 대출을 회수하는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기업과 가계 대출이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맥경화는 실물경기 침체를 장기화시켜 은행의 수익성과 자산건전성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비와 함께 투자 역시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이는 향후 산업생산과 고용에 악영향을 미치며, 투자가 절실한 에너지, 제조업 부문의 성장잠재력을 훼손시킨다. 기업 구조조정과 투자 감소로 실업률은 다시금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러시아 경제위기로 전이되는데 도화선이 되었던 막대한 기업부채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기업부문의 대외부채는 위기 이전보다 더 늘어 지난 해 말에는 2998억 달러(잠정치)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채무상환 부담을 가중시켜 기업경영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투자를 위축시키고 외환시장에 대한 취약성을 높이는 등 리스크를 증가시킨다.
결론적으로 지난해 3분기 이후 지표상 나타난 경기회복세는 생산∙소비 활동 등 민간자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유가상승에 따른 수출증가, 재정지출에 의한 경기부양책, 금리 인하 등 외부변수나 정책효과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주식시장이 경기의 선행지표이기는 하지만 과도한 유동성에 의한, 그리고 실물부문과 괴리된 주가상승은 러시아 경제의 왜곡된 단면을 보여줄 뿐이지 그것이 곧 경기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러시아 경제는 여전히 내수부진과 신용경색이 지속되고 있으며, 실업문제, 부실자산 증가, 기업 부문의 부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세계 경제의 더블딥(double dip)이 현실화되거나 급등한 유가가 조정을 받을 경우 러시아 경제의 회복세가 다시 둔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바로가기 (http://cafe.daum.net/kseriforum) 덧붙이는 글 | 정부와 언론이 왜곡하는 경제 정보를 꿰뚫어보고 건전한 민주주의 시장경제 건설을 위한 좀더 의미 있는 토론과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을 방문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