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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에 SSM(기업형 슈퍼마켓)이 속속 입점하면서 골목가게 중소상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동네 골목에 SSM(기업형 슈퍼마켓)이 속속 입점하면서 골목가게 중소상인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 허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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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가게라고 해도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죠. 정부에서 아무리 저리로 돈을 빌려준다고 해도 결국은 다 개인의 빚으로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서 'H 마트'를 운영하는 이영규(51)씨. 이씨는 주변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의 사장이다. 100평 정도의 규모에 직원도 13명이다. 하지만 그 역시 SSM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그의 가게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 '이마트 에브리데이'가 입점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사업조정 신청으로 아직 정식으로 오픈한 상태는 아니다. 그에게 정부가 중소상공인을 위해 추진 중인 '나들가게'에 대해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최근 동네 골목상권으로 진출하고 있는 기업형 슈퍼마켓에 대한 중소상인들의 반발이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나서 사업조정 등으로 일부 점포의 오픈이 미뤄지고 있지만, 해당 대형 업체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골목상권 진출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최근 소상공인을 집중 육성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나들가게'라는 대책을 내놨다.

정부의 대책에 일부에선 긍정적인 반응도 있지만, 실제 중소상인들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이영규씨처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매장이 아닌 작은 매장을 운영하는 영세업자들은 정부 방침에 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마디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1억 원 한도 4% 융자? "결국 다 개인의 빚"

이씨는 과거 정부의 재래시장 지원 사례를 들며 "정부가 지원한다고 하지만 80~100평 규모의 큰 매장에나 효과가 있을 뿐 작은 가게들이 지붕 뜯어고친다고 게임이 되겠냐"고 반문했다. 일단 SSM이란 점포 하나가 들어오면 주변 상권을 급속히 장악하고, 다른 업체들도 연이어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후 동네 골목 전체가 대기업들의 놀이터가 되고 개인 상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나들가게란
'스마트샵(Smart shop)'의 한글 이름으로 SSM과 경쟁할 수 있도록 영세상인들의 점포를 지원한다는 취지다. 정부는 1200억 원을 들여 올해까지 나들가게를 2000개 육성하고, 2012년까지는 1만 개까지 확대하겠다고 했다. 대상자는 매장면적 300제곱미터 이하 슈퍼마켓, 골목가게, 편의점으로 2월부터 6월까지 신청을 받는다.

나들가게 대상자로 선정되면 1억 원 한도로 연 4%대 융자, 경영지도 등의 종합컨설팅, POS 기기(금전등록기) 설치와 간판 교체, 나들가게 체인점 인증 등을 지원한다. 나들가게는 "정이 있어 내 집처럼 드나드는, 나들이하는 마음으로 가고 싶은 가게"라는 뜻이다.

이씨는 또 이미 전국에 '나들가게'와 비슷한 공동구매조합인 '코사마트'가 있다고 했다. 이씨는 코사마트를 "사실상 실패한 사업"이라며 "기업의 영업전략을 정부가 못 따라가기 때문에 나들가게도 장기적으로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가게의 손님들과 안부를 물어가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의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는 단골이었다. 그는 SSM이 들어오면, 동네 상권에서 점포와 손님 간의 훈훈한 모습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아무리 자본주의 경제라고 하지만 엄연히 사회정의와 기업윤리가 있지 않은가"라며 "밥 더 얹어주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밥이나 챙겨먹게 해줬으면 한다. 정부의 나들가게 정책은 밥그릇 뺏어가고 빵 던져주는 격"이라고 비난했다.

강동역 근처에서 김장한(52)씨가 운영하는 슈퍼 내부. 생필품 등 1차 상품들이 대부분이다. 50미터 거리에 롯데 '마켓 999'가 입점해 있다.
 강동역 근처에서 김장한(52)씨가 운영하는 슈퍼 내부. 생필품 등 1차 상품들이 대부분이다. 50미터 거리에 롯데 '마켓 999'가 입점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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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부·이웃에 3번 치이는 골목가게

자리를 옳겨 서울 강동역 근처에서 김장한(52)씨를 만났다. 그는 'K 슈퍼'를 운영한다. 창고까지 합쳐 27평짜리 점포를 김씨와 부인 둘이서 맡고 있다. 그의 가게에서 불과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는 롯데의 '마켓 999'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널찍하고 깔끔한 SSM에 비하여 김씨의 가게는 좁고 허름해 보였다.

정부의 나들가게 정책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금세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슈퍼마켓이 전국에 약 13만 개가 있는데 그중 극히 일부를 지원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겠냐는 것이다. 오히려 나들가게 때문에 영세상인들은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했다. 김씨의 말이다.

"올해 2000개, 2012년까지 1만 개를 만들겠다는데, 전부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나머지는 어떡하라고. 1만 개 만들면 나머지 12만 개는 도태되는 것 아니야? 나들가게 옆 이웃 골목가게는 망하라는 소리지. 그럼 골목슈퍼는 기업에 한 번, 정부에 두 번, 이웃에 세 번 치이는 거야. 그 나머지 사람들 대책을 세워주고 나들가게든 뭐든 지원해야지."

또 김씨는 나들가게가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골목슈퍼를 하는 영세상인들 대부분은 건물에 세들어 장사하는 세입자라는 것이다. 나들가게를 꾸밀 돈도 마련하기 어렵고 설사 마련한다고 해도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김씨는 "1억 원 들여서 나들가게 차린다고 쳐도 건물 주인이 나가라면 빚만 지고 쫓겨난다"며 "정부는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정릉동 상인연합회 회장 박은호(46)씨는 자신의 가게 입구에 '근조 정릉동 자영업자 5000명'이라는 근조기를 붙였다.
 정릉동 상인연합회 회장 박은호(46)씨는 자신의 가게 입구에 '근조 정릉동 자영업자 5000명'이라는 근조기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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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가게 이전에 SSM 규제부터"

서울 성북구 정릉 2동 길음정릉시장에서 G마트를 운영하는 박은호(46)씨. 박씨는 정릉동 상인연합회 회장이다. 50평짜리 그의 가게 입구에는 '근조 정릉동 자영업자 5000명'이라는 근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정릉 1동에는 150평짜리 롯데 마이슈퍼가, 정릉 4동에는 200평짜리 하나로마트가 입점했다. 박씨는 하나로마트가 입점하자 25%, 마이슈퍼가 입점하자 15% 정도 정릉시장의 평균 매출이 감소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거기에 정릉시장과 100미터 거리에 300평짜리 '이마트 에브리데이'가 입점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사업조정신청 대상이 되어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나들가게 정책에 대해 물었더니, 박씨는 "정부에서 하겠다는 건 융자 안 받아도 상인들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코웃음을 쳤다. 그는 "점포 깨끗하게 꾸미는 건 당연한 거고, POS 기기를 설치해서 전산화한다고 하는데 우리 가게 같은 경우에는 이미 다 설치돼 있다. 또 경영교육을 한다면 무얼 할 것인가"라며 정부 대책에 강한 불신감을 나타냈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일부는 골목가게에서 이미 다 하고 있는 것인데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수요가 높은 10개 상품의 공동구매에 대해서도 박씨는 기존 납품업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공동구매를 한다면 소매상에 물품을 공급하던 도매상인들이 피해를 본다"며 "나들가게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매상보다 도매상이 더 난리"라고 귀띔했다. 그에게 '나들가게 신청할 것인가'라고 묻자 "절대 안 할 생각이며 주변에서도 하겠다는 상인은 단 한 명도 못 봤다"는 답이 돌아왔다.

신규철 중소상인살리기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나들가게는 SSM과 경쟁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단순 '리뉴얼(renewal)'을 한다고 해서 골목가게에 경쟁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 위원장은 "정책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며 "나들가게 같은 영세업자 활성화 정책은 SSM 규제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의 나들가게 정책이 SSM 문제의 초점을 흐리고 비난을 피하려고 내놓은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나들가게를 일종의 '공공형 프랜차이즈'로 규정한 그는 무엇보다 SSM같은 '기업형 프랜차이즈'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제가 우선이라고 했다. 이후 중소상인들이 경쟁력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나들가게로 SSM과 경쟁할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허진무 기자는 오마이뉴스 11기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나들가게, # 스마트샵, #S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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