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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몬 마을.
 사사몬 마을.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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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기다림의 끝이 어디로 닿게 될지 우리는 절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꿈을 꿀 수는 있다. 어떤 이는 부자가 되기를 꿈꾸며, 어떤 이는 성공을 꿈꾼다. 어떤 이들은 긴 여행을 떠나기를 꿈꾸며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만남을 꿈꾼다.

에르미타 여행에서도 기다림은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으며, 많은 절망 또한 가져다준다.

잿빛 하늘을 기다리며.
 잿빛 하늘을 기다리며.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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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은 곳은 스페인 북부에 있는 사사몬(Sasamón) 마을이었다. 세바스티안은 올해로 4년째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바로 아르코 드 산 미구엘(Arco de San Miguel)을 찍기 위해서이다. 해마다 이곳을 찾고, 또 기다렸지만 이곳의 하늘은 늘 영롱한 파란색을 원망스럽게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과 사진사 중 누가 더 질긴지를 겨루는 시합 같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푸른 하늘 밑을 달리고 달려 에르미타에 도착했다. 아르코 드 산 미구엘(Arco de San Miguel)이라 불리는 사사몬의 에르미타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아랍 양식이 조화롭게 섞인 건축물이었다. 현재는 아치만 고스란히 남고 다른 부분은 모두 사라져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마치 아치를 통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바스티안은 그 아치 주위를 오랫동안 서성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두터운 눈을 밟고 있는 발에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매우 우스꽝스럽고 하찮음에서 시작한다

회색 하늘을 기다리는 동안의 산책.
 회색 하늘을 기다리는 동안의 산책.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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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몬 마을의 공동묘지.
 사사몬 마을의 공동묘지.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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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추위 속에서 초조하게 떨며 하늘이 잿빛 구름으로 가려지기를 기다리는 대신 눈으로 덮인 하얀 마을을 산책하기로 했다.

마을마다 설치된 약수터.
 마을마다 설치된 약수터.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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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유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을은 모노톤이며 중세시대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소박한 돌다리와 공동묘지, 시냇가의 갈대들이 마을을 꾸미는 장식요소 전부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은 고딕 스타일과 비교하면 소박하고 무거운 감이 있다. 고딕의 높은 천정도 밝은 빛을 비추는 창문도 로마네스크 스타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아랍인들의 지배를 오랜 시간 받은 탓에 로마네스크의 기독교 건축 양식은 모자랍이라는 독특하고 아이러니한 새로운 형태를 가끔 보여주기도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혼합이라… 깊이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종교 분쟁이건, 정치적인 싸움이건 간에 그 시작은 매우 우스꽝스럽고 하찮음에서 시작한다.

그들을 통해 인류가 발전하고 전쟁하며 지금껏 지탱해 온 것이다. 인류, 호모사피언스, 지혜로운 동물, 바로 우리다.  

동네 어귀에 모인 보대가(포도주 창고를 일컫는 스페인 어)들.
 동네 어귀에 모인 보대가(포도주 창고를 일컫는 스페인 어)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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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추위가 찾아드는 지형 때문에 마을의 집들은 모두 저마다 작은 포도주 창고를 옆에 하나씩 끼고 있다. 이들은 스페인어로 보대가(Bodegas)라 불린다. 보대가의 문을 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바로 나오는데, 그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가면 캄캄한 지하세계에 어느덧 도달할 수 있다.

이 으슥한 지하세계 온도는 사계절 모두 동일하여 포도주나 곡식들을 오랜 시간 저장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와인셀러들의 세련됨과 화려함은 아니지만 어쩐지 더 진정함이 느껴지는 모습, 꾸미려 하지 않아도 삶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흰백의 눈에 싸인 사사몬 마을.
 흰백의 눈에 싸인 사사몬 마을.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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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궁전으로 탈바꿈한 사사몬 마을.
 얼음궁전으로 탈바꿈한 사사몬 마을.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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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덮인 사사몬 마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동화 속의 장면들을 연상시켰다. 얼어버린 버드나무들은 요정들이 조각해 놓은 크리스털 나무로, 보잘것없는 집들과 마을의 온갖 상점들은 요정들이 사는 작고 하얀 궁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시냇가에서 하얗게 얼어버린 갈대들이 작은 물살에 흔들려 서로 부딪히며 투명하고 차가운 얼음 소리를 조용히 내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꿈꾸는 것뿐

사사몬 마을 산책.
 사사몬 마을 산책.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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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에르미타로 돌아왔을 때 불길한 회색을 띤 구름 하나가 아치 뒤에 걸려 있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통해, 햇빛이 비추는 양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음의 하늘의 모습을 점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강한 존재는 하늘 밑에 움츠리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언제나 변덕을 부릴 수 있는 하늘이다. 구름이 아치 끝에 걸려 있다고 해서 떼구름이 몰려와 아치를 감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구름이 하나 둘 끼기 시작하다가도 쌀쌀맞은 바람 한 줄기가 흔적을 만들거나 모두 쓸어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 동안 아치 뒤의 하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늘의 구름들이 아치 뒤로 아주 느리게 모이기 시작했다. 그전에 사진을 찍어야 했다. 날이 너무 어두워지면 우리의 기다림은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그때였다. 누군가 저 위에서 마법을 부리듯 하늘에 떠 있던 모든 구름이 에르미타의 아치 뒤로 모두 모인 것이다. 마치 기도가 이루어진 것 같은 이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에르미타를 지었던 이름없는 수도자가 우리를 도운 것이었을까? 아니면 신이 친절한 바람을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었을까?

첫 번째 사진 촬영.
 첫 번째 사진 촬영.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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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안은 감격한 듯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핀홀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냈다. 구름에 가려진 늦은 오후의 태양이 부드럽게 감싸 안은 에르미타의 금빛 색조가 배경에 깔린 청회색의 구름들과 아름다운 콘트라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사진사 세바스티안은 카메라를 치켜들고 사다리 위에 올랐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그가 꿈꾸는 대로 종이 위에 반영이 될지는 귀향하는 4월이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역시 기다림의 연속인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꿈꾸는 것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태그:#에르미타, #사사몬, #스페인, #아르코 드 산 미구엘, #세바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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