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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게시판에 전체 학생들 전체 석차와 반 석차, 언어수리외 석차, 총점, 각 부문별 점수가 자세하게 적혀서 걸려 있다.
 학교 게시판에 전체 학생들 전체 석차와 반 석차, 언어수리외 석차, 총점, 각 부문별 점수가 자세하게 적혀서 걸려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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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생활 8년만인 올해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됐다. 방학 내내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와 각종 참고서를 구해 미리 읽어보는 등 수업 준비를 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 중이다. 아울러 시중에 나와 있는 입시지원요강이나 수험서 등도 함께 몇 권 구해 읽고 있는데, 좋든 싫든 고등학교 생활이 대학입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로운 근무 환경을 앞둔 지금 설렘 반, 긴장 반이다.

그런데, 겨울방학 중 보충수업을 하시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바람에 갑작스레 그 수업을 대신하게 됐다. 올해 수능을 치르게 될 예비 고3 수험생들이라 자못 긴장되었고, 건네받은 교재를 분석하느라 몇날며칠을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해야 했다. 중학교에 견줘 내용이 조금 자세해졌을 뿐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아무래도 수능을 코앞에 둔 아이들 앞이라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밑줄 긋는 볼펜 소리만 울리는 고3 교실

지난해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던 P여고 고사장의 모습.
 지난해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던 P여고 고사장의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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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수업에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예상했던 대로 고3 수험생과 마주한 수업은 쉽지 않았다. 중학교 교실처럼 왁자지껄하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그런 수업 분위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이 오로지 교재로만 향해 있는 무미건조함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조금 과장하자면, 고3 교실은 교재에 밑줄 긋는 볼펜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적막강산이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고개 숙인 채 잠자코 있거나 귀찮다는 듯 시큰둥한 답변만이 가을바람에 낙엽 쓸리듯 스쳐지나갈 뿐이다. 정열과 패기가 넘쳐야 할 열여덟 살의 눈들은 졸린 듯 반쯤 감겨있고, 하나같이 생기 잃은 멍한 표정이다. 고3의 팍팍한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념무상의 달관의 경지에 있는 도인의 눈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그 발랄하고 거침없었던 모습은 대체 어디에다 내버린 걸까.

새 학년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고등학교 생활을 낯설고 두렵게 만든 건 정작 따로 있다. 모의고사를 치른 후 1등부터 꼴찌까지 기록한 석차표가 교실 복도 한 가운데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있는 걸 보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기에 항의표시를 하거나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학생들이 없었다는 거다. 벽에 붙어있는 석차표를 보고 자못 놀랐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그닥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외려 다른 학교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며, 괜히 항의했다간 선생님들로부터 매만 벌게 될 것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댄다.

되레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그 아이들을 접하면서, 20여 년 전의 '아름다운'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동기생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된, 이른바 '등수표 훼손 사건'이 그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그것은 선생님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됐고 그 어떤 교칙 위반보다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기에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상위 100명과 하위 100명 이름이 매월 복도에 걸리다

학교 게시판에 걸린 학생들 석차 게시물.
 학교 게시판에 걸린 학생들 석차 게시물.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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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인즉슨 이랬다.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에 다닌 탓에 성적과 석차에 대한 강박은 지금 못지 않았고, 경쟁만이 살 길이라며 매월 석차와 평균 점수를 전지 크기 종이에 적은 등수표가 복도 한 복판에 나붙었다. 학급당 학생 수도 지금의 갑절 가까이 된데다 학급 수도 많아 모든 학생의 그것을 다 적을 수 없었던 탓인지 상위 100명과 하위 100명을 따로 적어 게시하였다.

지금이야 컴퓨터의 도움으로 몇 백, 몇 천 명까지도 게시 공간만 허락된다면 문제없을 테지만, 그때는 전지에 굵은 매직펜으로 일일이 적어야 했기에 전체 학생 수의 20% 남짓한 그 수도 결코 적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매월 모의고사가 끝날 때마다 공부가 뒤처진 아이들은 자기의 이름이 적힐까봐 전전긍긍했고, 창피한 마음에 며칠간 결석하거나 드물게는 학교를 그만 둔 경우도 있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아이들을 향해 선생님들은 오로지 "창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블랙리스트'에서 벗어나라"고만 외쳤다. 누가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하위 100명을 적어 붙인 것을 당시 '블랙리스트'라고 불렀다. 아이들의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조롱하는 아이들은 없었지만, 리더십이 있고 활달한 아이들조차 주눅이 들어 학급 일이든 학교 일이든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엄청난 사고가 터졌다. '블랙리스트'가 갈기갈기 찢겨진 채 잔해만 복도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이들 모두가 주변에 모여 웅성거렸고, 급기야 선생님들은 하루 종일 용의자 색출에 나섰다. 당시 교실 문단속을 책임지는 주번 학생들이 불려갔고, 누가 더 나중에 귀가했는지를 분과 초로 따져보는 웃지 못할 상황도 전개됐다.

이튿날 아침 처음이라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 않고 용서하겠다는 교내 방송이 있었고, 그날 저녁 블랙리스트는 깨끗한 새 종이에 다시 쓰인 채 붙여졌다. 애꿎은 학급 주번들이 봉변을 당했지만,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쾌하고 신나는 일이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불과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갔다. 며칠 전 선생님들의 격노와 발본색원의 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예 꼬깃꼬깃 구겨져 있었다. 선생님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또 다시 용의자 색출의 광풍이 몰아쳤다.

이번에 끌려간 아이들은 주번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혼쭐나고서 또 사고 칠 리 만무하다고 여긴 것일까. 선생님들은 틀림없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아이들 중에 한 명의 소행이라며 꼴찌부터 십수 명을 차례차례 굴비 엮듯 소환했다. 소환의 근거란 단지 평상시 수업 태도가 좋지 않았거나 자주 까불었다는 것뿐이다. 아이들은 불려가면서 하나같이 '공부 못한 게 죄'라며 고개를 떨궜고, 얼마 안 있어 어김없이 매타작 소리가 들렸다.

요즘 같으면 CCTV라도 설치했겠지만, 밤 새워 잠복할 수도 없는 노릇. 범인을 찾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달의 것은 다시 붙여질 수 없었고, 이후에도 무슨 까닭에서인지 상위 100명의 이름만 내걸릴 뿐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아예 사라졌다. 어쨌든 학창시절 학생이 선생님들의 두 손을 들게 만든 유일한 경험이자 추억으로 남았다.

20년만에 다시 보게 된 '석차공개표'

우리 교육에서 무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과연 블랙리스트 공개가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 아닌지를 지금 따져보고 싶진 않다. 사진은 KBS 드라마 <눈의여왕>의 한 장면.
 우리 교육에서 무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과연 블랙리스트 공개가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 아닌지를 지금 따져보고 싶진 않다. 사진은 KBS 드라마 <눈의여왕>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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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누구의 소행인지 시원하게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그 아이는 동기생들 사이에서 '얼굴 없는 영웅'이 되었고, 우리 학교의 홍길동이니, 일지매니 하면서 꽤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들끼리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첫손가락에 꼽히는 '전설'이 되었다.

그건 당시 블랙리스트가 아이들에게 큰 상처가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설령 그것이 학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교육적으로 옳지 못한 방식이라는 걸 예나 지금이나 깨닫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비록 비겁한 방식이었으나 목적과 결과가 정당하다면 수단과 과정은 무시될 수 있다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아이들이 용납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 20년도 더 지난 지금 사라졌을 거라고 여겼던 블랙리스트가 컴퓨터의 도움으로 더욱 일목요연하게 편집되어 게시돼 있는 것이다. 상위와 하위의 몇몇 학생들만이 아니라 아예 모든 학생들의 석차가 공개돼 있다. 등수표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자신과 친구의 석차를 비교해보는 것도,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애써 무시하며 그냥 지나치는 모습도 똑같다.

우리 교육에서 무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과연 그것이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 아닌지를 지금 따져보고 싶진 않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아이들에게 주는 상처는 깊고도 크다. 대학입시와 학력 향상이라는 대의 앞에 그들은 무시되고 상처받아도 괜찮은 존재일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깟 상처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는 훈계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적이 뒤처지는 아이들은 대개 석차 공개를 '확인 사살'로 받아들인다. 공개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자신의 성적을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다. 꼴찌라고 꼭 밝혀줘야 공부를 하게 될 거라고 여기지 않는 다음에야, 아이들의 소중한 자존감을 훼손시키는 비교육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일까.

감수성이 많이 무뎌졌을지언정 상위권 아이들도 등수표에 관한 인식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상위권 아이들도 등수표 앞에 서면 마음이 편치는 않은 모양이었다.

"너희들이야 보란 듯 뽐내며 으스대고 싶을 테지만, 꼴찌 아이들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될 것이다."
"선생님,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저희들도 상처를 많이 받아요.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말해요. 이건 1등만을 위한 제도라고."

사족 하나 더. 최근 들어 부쩍 잦은 공문 중에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것들이 있다. 교사든 학생이든 개인 신상에 관한 모든 정보가 기록된 문서를 함부로 방치해서는 안 되고, 당사자의 허락 없이는 열람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게 골자다. 여기서 개인정보란 주민등록번호나 계좌번호는 물론 전화번호, 주소, 가족관계, 직업까지도 모두 포함된다고 하니, 학생들의 성적 또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소중한 개인 정보랄 수 있겠다.

한쪽에서는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이면지로도 재활용 못하도록 조치하고, 학교마다 문서쇄절기를 의무적으로 구입해 설치하는 등 호들갑을 떨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성적이 담긴 아이들의 개인정보는 공개를 넘어 홍보하고, 열람을 권장하고 있는 셈이다. 경쟁지상주의에 매몰된 우리 교육의 현실에서 과연 불가피한 일일까.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석차 공개, #교육의 퇴행, #개인정보보호, #대학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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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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