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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춤과 드러남의 미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황산. 사진 오른편에 바위 위의 한 그루 소나무가 마치 붓을 닮은 '몽필생화'가 보인다.
▲ 황산비경 감춤과 드러남의 미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황산. 사진 오른편에 바위 위의 한 그루 소나무가 마치 붓을 닮은 '몽필생화'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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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필생화
 몽필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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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아니, 마음을 비울 수가 없었다. 중국의 명산인 황산에 올랐다가 눈앞에 부옇게 드리워진 구름만 쳐다보다 허망하게 내려 가야하다니! 더구나 나로서는 해외 첫 나들이였던 것이다. 동네 산이나 오르고 방천길이나 즐겨 걷던 내가 1990년 유네스코가 세계 자연유산으로 인정한, 중국인들이 신성시하는 황산에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쉽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쯤 산이 구름과 안개로 차일을 치고 암중모색하거나 묵언정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쭙잖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이기도 했다. 산의 무거운 침묵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하였다. 애써 올라와 산의 침묵만 지켜보다 내려가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 같았다. 침묵할 수 있다는 것, 자기를 지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지난 1월 30일, 산이 그립고 산이 좋아 만난 '올뫼산악회' 회원 5명은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의 명산 황산을 향했다. 오후 3시 반에 부산김해국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중국 현지시각 오후 4시 반에 항주소산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은 2시간이 걸렸지만 한국과 중국의 한 시간의 시차로 인해 1시간이 절약된 셈이 되었다. 물론 돌아갈 때는 그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로서는 그런 당연한 현상마저 자못 흥미로웠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요, 인구 약 600만 명이 거주한다는 항주공항에서 만난 현지 여행가이드는 고구려 요동성에 뿌리를 둔 퍽 잘생긴 외모의 조선족 청년(기혼남이지만 내 눈에는 청년 같이 보였다)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우리말을 모국어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다.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닌 그는 중국은 잘 살면서도 못 사는 나라요, (차이)가 많이 (나)서 '차이나'라고 밉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항주에서 한국식 저녁을 먹고 황산으로 이동했다. 항주에서 황산까지는 전용버스로 약 4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눈은 줄곧 차창 밖을 향해 있었고 귀는 여행가이드의 구수한 달변을 즐기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이미 황산에 가 있었다. 황산에 가면 황산을 볼 수 있을까? 이런 우문이 가능한 것은 '아기 얼굴'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황산의 변화무쌍한 날씨 때문이었다. 1년 중 약 280일 동안은 구름과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황산에서 나는 과연 해맑게 웃은 '아기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아예 버리라는 듯 버스가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호텔에 당도할 무렵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다음날 아침이 되자 비는 그쳐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언제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일행들은 영화 <와호장룡>으로 유명하다는 '비취계곡'을 탐방했다. 그곳은 중국 평야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환상의 코스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평야지대에 사는 중국인이 아니었음으로 황산을 오를 워밍업을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안개가 거치자 한 폭의 그림처럼 드러난 소나무에 상고대가 서려 있다.
▲ 황산 비경 오랜 침묵 끝에 안개가 거치자 한 폭의 그림처럼 드러난 소나무에 상고대가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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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에서는 여행가이드가 한 명 더 합세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황산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해온 등소평이 76세의 나이로 걸어서 등정한 뒤부터 유명해졌다고 한다. 황산의 신비한 풍경을 목도한 그는 모든 여성들까지 등반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 후 21년에 걸쳐 정으로 돌과 바위를 쪼아 하나하나 연결하여 14만여 개의 계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 번째 밤을 보낸 산상호텔(북해빈관) 왼편에는 등소평의 대형사진이 걸려 있었다. 

황산의 최고봉인 연화봉(해발1864m)은 휴식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황산 제 2봉인 광명정(해발1840m)으로 등반 일정을 잡은 모양이었다. 사실 황산 여행을 등반이라고 말하기는 좀 쑥스러운 구석이 있다. 해발 약 1600m까지는 셔틀버스(혹은 전용버스)와 케이블카(운곡사~백아령)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운곡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는데 희미하게 등산로가 보였다. 언제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길을 따라 산을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새끼줄처럼 풀어져 있던 길이 안개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 후 한참동안 암전상태가 계속되었다. 보이는 것은 사면팔방 온통 하얀 안개와 구름뿐이었다. 무엇이 안개이고 구름인지 나로서는 분간할 재간이 없지만 어쨌거나 신의 하얀 입김 같은 것이 온 천지에 가득할 뿐, 아무것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케이블카 등받이에 몸을 부리면서 누군가를 향해 환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이제 마음을 비웁시다."
"그럽시다."

비래석에 세 번 손을 대면 재산운과 관직운, 그리고 복운이 터진다고 한다. 필자는 안개를 거두고 황산을 보여달라고 빌었다.
▲ 비래석 비래석에 세 번 손을 대면 재산운과 관직운, 그리고 복운이 터진다고 한다. 필자는 안개를 거두고 황산을 보여달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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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이 자물쇠를 걸고 열쇠를 벼랑으로 버리면 그 사랑이 영원하다고 한다(좌). 그런 사랑의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금슬이 좋아보이는 두 부부(우).
▲ 황산 연인들이 자물쇠를 걸고 열쇠를 벼랑으로 버리면 그 사랑이 영원하다고 한다(좌). 그런 사랑의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금슬이 좋아보이는 두 부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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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무구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하얀 안개뿐인 허공이 순식간에 화선지로 변하여 한 장 두 장 훌륭한 수묵화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의 좁은 공간에서 철부지 아이들 마냥 기뻐 날뛰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후 사위는 다시 안개에 덮이고 말았지만 이미 눈과 마음으로 보아버린 풍경마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이면 족하다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황산의 최고봉인 연화봉이 손에 잡힐 듯 보이고 발아래 펼쳐진 구름바다가 절경이라는 '광명정'에서, 구름과 안개가 서해의 골짜기들을 휘감아 솟아오르다 이곳에 이르면 저절로 거쳐져 물리칠(배)에 구름 (운)을 써서 이름을 지었다는 '배운정'을 허망하게 지나치면서 그런 서운한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갔다. 
          
다행히도 다음 코스가 바위의 기이한 모양이 마치 승천하는 듯하다는 '비래석'이었다. 높이가 무려 12m나 되는 이 바위를 남자의 경우 오른손으로 한 번 만지면 재산운이, 두 번 만지면 관직운이, 세 번 만지면 복운이 따른다고 한다. 나는 바위에 오른 손을 대고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 제발 안개를 거두시고 황산을 보여주세요."

황산 비경
 황산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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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호텔방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았다. 다행히도 손바닥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날씨는 전날보다 더 흐려져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일출 모닝콜을 받자마자 황산의 절경 중의 절경이라는 일출운해 감상의 명소인 '청량대'로 달려가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일출은 고사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이제 곧 산을 내려갈 시간인데 황산에 와서 안개만 보고 가야한단 말인가. 나는 마음을 비우고 싶었지만 좀처럼 비워지기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산을 내려갈 채비를 하다가 문득 오래 전에 쓴 시 한 편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한 해 동안 쓴 시를 불태우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는
그래서 한 편의 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어느 이름 없는 시인의
지워진 시편들이 문득 그리워졌습니다

산은 지워지면서
산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산은
연기와 안개로 차일을 치고
제 안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시 '지워진 산' 중에서 

시는 시인의 마음을 역으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나에겐 지워진 시편이 없다. 지워지기는커녕 시상이 머리에 떠오르는 순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다. 늘 그런 식이었다. 아마도 죽는 날 때까지 그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딴은 이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가끔은 나로 하여금 제 안을 들여다보게 하고, 침묵의 산을 그리워하도록 만들기도 했겠지만.

이제 산을 내려 가야할 시간이었다. 안개 속에 산을 두고 가더라도 마음에 회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안에 누구 있소?" 이렇게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는 지금 나를 대신해서 묵언정진하고 있을 것임으로. 다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잠시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하얀 허공 속에서 눈에 익은 형상이 하나 나타났다. 바위 위의 한 그루 소나무가 마치 붓을 닮은 기이한 형상이었다. 오랜 침묵이 우려낸 아름다운 그림은 사진에서만 보던 다름 아닌 '몽필생화(夢筆生花)였다.

절벽 위의 수려한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는 시신봉. 이곳에 오르고서야 황산이 중국을 대표하는 오악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시신봉이다.
▲ 황산비경 절벽 위의 수려한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는 시신봉. 이곳에 오르고서야 황산이 중국을 대표하는 오악보다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이 시신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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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의 신비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런 눈물 솟구치는 경이로운 순간도 없었으리라. 아, 기다리리라. 침묵 속에서 기다리리라. 나는 몇 번이고 그렇게 외치며 절벽 위의 수려한 소나무가 절경을 이루는 '시신봉'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시신봉(始信峰')이라함은 '믿음을 갖게 된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말로 '시신봉'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황산이 중국을 대표하는 오악(五嶽)보다도 더 아름다운 명산임을 믿을 수 있게 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아직 중국의 오악을 본 적이 없지만 그 말이 맞을 것 같았다. 황산은 감춤의 미학과 드러남의 미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천상의 세계를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황산은 중국의 산수화가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이 아닌 현실세계 그대로의 모습임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화가는 붓을 들어 눈에 본 것을 그대로 그렸을 뿐이었다.   

황산에 가면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인부들은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지고 있는 짐의 무게는 100kg을 넘는다고 한다.
▲ 황산 황산에 가면 무거운 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인부들은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지고 있는 짐의 무게는 100kg을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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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을 내려오다가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진 한 인부를 만났다. 여행가이드의 말로는 그가 진 짐의 무게가 100kg이 넘는다고 했다. 그가 진 짐의 십분의 일이라도 둘러매고 그가 걸어갈 길의 십분의 일이라도 따라가고 싶었다. 내가 황산에서 느낀 아름다움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황산을 다녀온 그 전과 그 후의 삶이 같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서 산을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황산에서 '웃는 아기' 얼굴을 본 '올뫼산악회' 회원들
▲ 황산 황산에서 '웃는 아기' 얼굴을 본 '올뫼산악회'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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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황산, #올뫼산악회 , #순천효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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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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