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슬픔이란 신파적이거나, 통속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를 간파한 황지우(시인)가 그랬던가. "슬픔처럼 쌍스러운 게 또 어디 있겠냐"고.
하지만, 예외 없는 원칙이란 없는 법. 누군가는 통속하고, 신파적인 슬픔을 격조 있게 노래할 줄도 안다. 그런 사람을 찾으러 무거운 행장을 꾸려 멀리 갈 것도 없다. 서울 서쪽 자락에서 십수 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 이규배(46)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가 쓴 시 '나는 오늘도' 도입부를 찬찬히 읽어보자.
빌딩 외진 그늘 앞에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생각을 한다 꽃나무는 꽃을 피우고 나비나 벌들도 날아왔다 가고 사람들은 떠들고 웃으면서 지나간다 그러나 이 순간이 외로울 리는 없다 외로움이 두려웠다면 세상은 벌써 버렸어야 했다 벌써 버리고 떠났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세상을 버릴 만큼 외로웠던 적도 순수했던 적도 없다 세상이 아름다워서 사는 것이 아닌 사람들은 상가(商街)의 불빛만큼이나 많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시인을 꿈꾸었던 영민한 문학청년에서, 시대의 아픔에 눈 돌리지 않았던 민족·민주 운동단체의 일원으로, 다시 학생들에게 올곧은 지향을 가르치던 스승으로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켜온 이규배. 간단치 않았던 삶의 궤적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한국문단의 원로 천승세는 그를 이렇게 평한다.
"오로지 진실과 정의, 그리고 구원의 일념 한 가지 뜻"을 지닌 후배라고, "고난이 찾아들더라도 운심월성(雲心月性)의 꽃씨를 품고 살아갈 사람"이라고. 서툰 언동을 보이지 않아온 대가(大家)의 보기 드문 상찬이다.
<비가를 위하여>이후 자그마치 15년 만에 선보이는 이규배의 세 번째 시집 <아픈 곳마다 꽃이 피고>(동랑커뮤니케이션즈)에는 이러한 칭찬에 부끄럽지 않은 절창(絶唱)이 열 손가락으로 꼽기에 모자랄 정도로 담겨있다. 오래 묵혀 곰삭은 '진미'(珍味)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시편들이다.
먹장구름 성큼성큼 몰려오는 절벽 끝 들리는 것 같다 불붙은 잎사귀의 노래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무덤들 갈라진 바위의 빗금 사이 고독하게 서 있는 나무들에게 못한 말 있다는 듯 눈이 오신다 솟아오르는 정결한 마음에 한밤까지 한낮까지 복된 꽃이 봉우리마다 그득한 광목 같은 한낮 못한 말 있다는 듯 눈이 오신다 - 위의 책 중 '별산정묘지음(別山頂墓地吟) 6' 전문. '불붙은 잎사귀'의 외마디 슬픈 비명과 '광목 같은 한낮'의 비루한 슬픔, 거기에 '못한 말 있어' 내리는 눈의 처연한 슬픔까지를 이토록 격조 있게 읊조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투적이지 않으며, 또한 천박하지도 않은 슬픔의 노래. 하여, 이규배가 이번 시집을 통해 보여주는 상처와 아픔은 투명의 그것에 가깝다.
책에서 시인의 시와 함께 '읽는 맛'을 주는 또 하나의 글은 이규배와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신입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25년 이상 슬픔과 기쁨을 같이 겪어온 문우(文友) 전상기의 해설이다. 전씨는 족히 원고지 100매에 육박할 글을 통해 이규배가 '투명하고, 솔직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간 슬픔'을 지닌.
친구의 출간을 축하하며 "이 책은 치열했던 그의 삶을 보여주는 진실의 기록이자, 미학적 고투의 결과"라고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는 전상기.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더불어, 그런 벗을 지닌 이규배 역시 행복하기는 마찬가지일 터.
아래는 전상기가 이규배를 부추기는 문장이 마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들이다. 맞다. 좋은 시는 짧다.
한 줄 읽고 한잔, 한 줄 읽고 또, 한 잔/열 손가락 끝 내려다보며 아홉 손톱 끝 발그레/누님 얼굴, 누님, 남국으로 시집 간/눈이, 눈이 큼지막한... - 위의 책 중 '일행독일잔음(一行讀一盞飮)'. 빙벽은/죽음과 맞서고 있다/잔설(殘雪)이 눈을 뜬다/얼어가는 숲에서/월광이 속살거린다/눈을 떠다오 바람아 - 위의 책 중 '별산정묘지음 8'.
책이 나올 즈음. 늦은 밤 허름한 목로에서 이규배를 만났다. 그는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선다"는 말로 스스로를 낮추며 겸양했다. 우락부락한 외양과 달리 한없이 고운 시인의 마음을 가진 그는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다. 허나, 바로 그 여린 성정과 상처가 그를 슬픔까지도 격조 있게 감싸 안을 수 있는 시인으로 키운 것은 아닐지.
내 보잘것없는 눈으로 보기에 '풍경(風磬)'은 이규배 제3시집의 '절창 중 절창'이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읽노라면 마흔 넘어 마를 대로 말라버린 척박한 마음의 땅에 단비가 스며드는 듯하다. 참으로 경험하기 힘든 진경이다.
덜컹대는 창호지문 더불어 깨어난 그가 며칠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겨우 넘기다가 아픈 발자국만 찍어 놓고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바람이 슬픔처럼 퍼지는 것 같다고 했다 사는 걸 아름다운 것이라며 일기장에 적어 놓았지만 힘이 드는 적이 올 때마다 얇아지던 마음은 유리창 같아서 오늘 같은 밤에는 그만 깨져 버릴 것 같다며 누군가 같이 울어주면 눈물에 녹을 것 같다며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한다... (이하 생략-나머지 구절은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