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초등학교교육과정에 한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연구보고서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교과부는 이 내용을 새 교육과정에 일부 반영하여 내년부터 초등학교 '창의적 체험활동'시간에 한자를 가르치도록 각 학교에 권고하겠단다. 평소 한자에 공을 들이는 조선일보에 난 기사인데 사실관계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한글단체는 기사의 사실여부를 묻는 질의서를 2월 8일 교과부에 제출한다.
[건의서] 초등학교 한자교육 반대 건의와 요청사항 (받음 : 교육부장관, 보냄 : 한글학회)|한말글 |
받음 :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보냄 : 한글학회
날짜 : 2010. 2. 5.
1. 우리 한글학회는 나랏일로 많이 바쁘신 귀 기관이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하도록 한다는 조선일보 보도에 대하여 몹시 걱정하며 건의합니다.
2. 1월 29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교과서의 기준과 지침을 마련하는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한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연구 보고서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한 것으로 28일 확인됐다. 교과부는 이 내용을 새 교육과정에 일부 반영해 내년부터 초등학교 '창의적 체험활동'(기존 특별활동과 창의적 재량활동이 통합된 것) 시간에 한자를 가르치도록 각 학교들에 권고하며, 앞으로 사회적 요구를 살펴 한자교육을 더 활성화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밝혔다......(줄임)."고 했습니다.
3.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교육부는 이 일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건의(성명서 붙임)하며, 다음 사항에 대해 성실한 답변을 요청합니다.
- 다 음 -
1. 평가원에 연구를 맡기게 된 배경과 맡긴 내용은 무엇입니까?
2. 기사 내용대로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하도록 할 것입니까?
3. 연구 보고서를 공개하기 바랍니다.
[붙임] '초등학교 한자교육을 책동하는 장사치들을 규탄한다.' 성명서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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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초등학교 뿐 아니라 유치원 때부터 배워도 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의무교육으로 정하는 일은 문제가 많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한자 배우기 어렵다.
한자는 누가 뭐래도 배우기 어려운 글자다. 한자교육평가원에서 나온 초등학교용 한자교육 교재만 살펴봐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일. "한자야! 이야기랑 놀자! 4단계 첫 장-흥부전 첫 번째 이야기-"를 보자.
"아득히 먼 옛날 동산(園)아래에 있는 큰 집(家)에 마음씨 착한 흥부와 계산적이고 셈(計)이 철저하고 벼슬(官)도 하지 못한 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놀부네 가족은 가장(最)좋은 옷을 입고 음식을 배불리 먹었으나 흥부 가족은 허름한 옷에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놀부는 시간(時)이 지날(過)수록 동생 흥부를 믿지(信)못하였습니다."이야기에 나오는 단어를 '한자 어원''한자 용례'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한 글자씩 풀이한다.
園 동산 원( □부 10획) = □ (에워쌀 위) + 袁(옷치렁거릴 원)넓게 옷을 챙겨 싸는 곳 같은 곳이 '동산''뜰'의 한자어원이란다. 억지스럽다. 넓게 옷을 챙겨 싸는 곳 같은 곳이 동산? 아이들이 선뜻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家 집 가 (宀부7획) = 宀(집 면)+豕(돼지 시)돼지를 집에서 길렀다는 데서 유래된 글자로 풀이했다.'집 면'을 설명하면서 지붕모양을 그려놓았고,'돼지 시'를 풀이하면서 돼지가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림을 덧붙였다. 돼지가 사람처럼 앉을 수 있나. 설명을 위한 억지춘향이다. 낱낱이 부수를 배우고 획을 익히고, 글자의 뜻과 소리를 새겨야 한다. 도대체 몇 단계나 거쳐야하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園 家 計 官 最 時 過 信 여덟 글자를 모두 이런 식으로 배운다.-동산 집 셈 벼슬 시간 지나다-로 말하면 유치원생도 금방 알아들을 말인데. 초등학교 때는 억지스럽게 풀이한 한자를 외우는데 매달릴 때가 아니다. 생활 속에 쓰이는 동산 집 셈 시간 같은 개념을 정확히 익히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가르침과 사람들 사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익힐 때다.
노신은 "한자가 없어지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일반인들이 많이 쓰는 2300여 글자를 쓰기 쉬운 간체자로 바꾸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쓰다 못해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못해 안달하는 옛 한자는 버렸다. 그만큼 배우기 어려워서다.
한자말 쓰이지 않는 말이 더 많다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 말 70%가 한자말이다l."
한자를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사람들 주장으로 늘 빠지지 않는다. 사전을 펼쳤다. 서울 경(京)이라는 말을 찾아보니. 상경(서울로 올라감-아직까지 많이 쓰이는 말이다) 귀경(서울로 돌아옴-설이나 여름휴가 때 많이 듣는 말이다)이 그나마 눈에 뜨이고, 나머지는 처음 들어보고 쓰지 않는 말이다.
경행(서울로 감)입경(서울로 들어옴), 퇴경, 출경(서울에서 나감)경궐(서울의 궁궐)경군(서울의 각 영문에 속해 있는 군사)경답(시골에 있는 서울사람의 논)경도(서울)경락(서울)경방(서울의 동)경본(서울에서 유행되는 본)경부(서울)경사(서울)경산절(서울 부근 산의 절)경산목(서울 부근 산에서 나는 재목)경성(서울)경소(각 지방의 덕목 높은 이를 같은 고을 사람끼리 서울에 묵게 하여 그 지방의 일을 주선 의논하게 하던 장소)경시(삼 년마다 서울에서 보던 소과의 초시)경신(서울에서 온 편지)경실(왕실)경언(서울말)경외(서울과 지방)경읍(서울)경인(서울사람)경장(시골에 있는 서울사람의 농장)경전(서울의 돈풀이)경조(서울)경조(서울의 풍습과 습관)경종(서울에서 생산되는 채소종자)경지(서울이었던 터)경창(서울에서 부르는 노래)경호(경기도 충청도의 병칭)경화(서울의 번화함) 서울 경(京)자가 들어간 단어 35개 가운데 상경과 귀경 2개를 빼고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다. 사전에는 이런 말이 숱하다. '잠깐 동안'은 한자로 구각(구?刻)이다. 도깨비불은? 귀린(鬼燐)이란다. 우금(于今)은? '지금까지'란 뜻이다.
언어생활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한자를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전에는 이처럼 (쓰지 않고)죽은 말이 넘친다. '여름' 대신 하절기라 쓰고, '겨울'을 동절기라 부른다고 아이들 삶이 풍성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름과 겨울에 얽힌 아름다운 정서마저 사라질까 겁난다. 생활 속에서 쓰지도 않는 어려운 한자를 의무적으로 강요하기 전에, 초등학생들에게 우리말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일이 급하다.
한자말 사교육비 늘어난다조선일보는 2007년 11월3일"한중일대만, 한자통일"이란 제목으로"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4개국의 학자들이 자형(글자의 모양)을 통일한 5000~6000자의 상용한자 표준자를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중간 생략-그러나 그해 11월 11일치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문화일보들과 연합뉴스는"중국 교육부는 한자통일에 관해서 합의한 일이 없다"면서, 중국 교육부 언어문자응용관리소 야오시솽 소장은"중국의 표준글자는 간체자이며 국가가 통용하는 언어와 문자에 관한 법 규정이 쉽게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우리말 우리얼 제58호 -이대로 글-에서) 조선일보가 이렇게 한자에 공을 들이는 까닭이 뭘까. 한자가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되면 엄청난 사교육시장으로 떠오른다. 학생을 상대로 한자검정시험을 볼 뿐 아니라 공무원과 일반 회사원들까지 한자검정시험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 터다. 한자가 초등학교 의무교육으로 자리 잡으면 한자능력시험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학교 차원에서 시험으로 몰아갈 것이 뻔하다.
59만8천명의 초등학생이 3급 한자능력시험에 한 번 응시(1회 응시료 18000원/인터넷 응시료 19300원)한다고 할 때, 교재나 학원비를 제외한 응시료만 100억 원이 넘는다. 한자 1800자를 읽고 쓸 줄 알아야 3급 자격증을 딸 수 있다. 한자능력시험 2급을 통과하려면 2355 글자의 뜻과 소리를 눈감고 외어야 하며 1817자를 써야 한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부을까. 한자를 안다고 한시를 짓거나, 한문을 줄줄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교육비는 고스란히 떠안되, 현실에서 쓰임새는 없는 것이 한자교육이다.
배우고 싶고 한자에 자질이 보이는 학생은 따로 배우면 될 일이지, 초등학생 모두를 암호해독 같은 어렵고 현실에서 쓰임새가 없는 한자교육으로 몰아갈 일은 아니다.
초등학교 한자의무교육은 아이들에게서 다른 기회를 빼앗는 일초등학생들이 배우고 익힐 일이 한자만이 아닐 터인데. 아이들을 언제까지 책상머리에 잡아둘 작정인가. 초등학생들은 손과 발을 놀리고, 움직여야 몸과 마음이 함께 클 수 있을 텐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혀놓고 영어의무교육도 모자라 한자교육까지 요구하면 다른 일은 엄두조차 낼 수 없으리라.
의무교육과 선택교육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의무교육으로 채택하면 시험으로 평가받고, 성적이란 꼬리표가 만들어져, 평생 아이 뒤를 따라 다닌다. 누구든 담담하게 여기기 힘들게 되어있다. 아이와 엄마아빠는 좋아하는 여행이나 운동,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포기하는 대신, 한자를 배우고 익히는데 뛰어들 것이 뻔하다. 이 오덕 선생은 어려운 한자말이 우리 사회 억압 장치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어려운 말과 어려운 글자를 익히는 데만 온 힘을 쏟도록 하여, 참된 것과 올바른 것을 찾아가지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