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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고향 초등학교의 동창회가 있었다.

동창회 집행부의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준비로 말미암아

덩달아 열린 윷놀이 대회도 한껏 무르익은 화기애애의 정점이었다.

 

그제는 또 40년 만에야 비로소 참석한

'부산 아지매' 동창생도 자리를 함께 하여 더욱 정겨웠다.

다만 하나 아쉬웠던 건 그날 처음으로 참석키로 했다는

크게 보고팠던 동창생 중 하나가 그만 펑크를 내어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요즘 초등학교는 '소수 정예'를 목표로 하기에

한 반(班)의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엔 그야말로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면 우리가 6학년 무렵엔 반이 4개 있었다.

6학년 1반은 73명 2반은 76명, 3반은 71명 4반은 74명 ...

 

이렇게 도합 294명이 같은 학교서 공부를 했다.

나는 그 때 2반이었으니 우리 반의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셈이다.

 

그날 다시금 느낀 바이지만 이제 우리 동창들은 나이가 다들 지천명이 넘었다.

그런 까닭으로 누구는 벌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친구도 있다.

 

나처럼 두 아이가 대학을 모두 마치는 경우도 있으되

늦둥이를 둔 때문에 아직도 교육비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한 친구도 없지 않다.

여하튼 중요한 건 나를 비롯한 동창들 모두가

지난 시절을 참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인생'이라는 무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건 한 마디로 언제 어디서 불어올 지 알 수 없는 태풍이자 폭풍의 연속이었다.

 

또한 그러한 칼바람의 언저리엔 속수무책의 쓰나미도 간혹 숨어있는 자객으로 발동했다.

우리 때는 모두들 그렇게 가난하고 피곤한 일상에 찌든 삶의 연속이었다.

 

개중엔 부유한 친구도 없지 않았으되 그 수는 기실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래서 지금이야 웬만하면 대학을 가는 시절이지만

당시엔 고작 초등학교만 졸업하곤 곧바로 자신의

밥벌이 전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친구들도 상당했다.

 

'기술을 배워야 산다'는 어떤 명제는 모두가 아는 공통의 상식이었다.

그래서 어떤 동창은 양복점의 '시다'로, 또 어떤 친구는

구둣방의 점원으로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렇지만 기술자가 되는 길은 결코 녹록하고 만만한 게 아니었다.

이른바 고참과 기술자로부터 무시로 행해지는, 아니 자행되는

언어적 무시와 폭력 등은 어쩜 차라리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우리 동창들은 다들 감수했다.

당시에 그조차 이겨내지 못 하면 군대에 가서 신병교육조차 이수치 못 하고

탈영한 것만큼이나 아주 허릅숭이로 보는 사회적 시각 때문이었다.

 

더불어 우리는 그 지독한 가난을 떨쳐내고자 다들 그렇게 이를 악물었다.

아울러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비록 불운하고 박복까지 하여 고작 초등학교만 나왔다지만

내 자식들만큼은 그리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 자연스레 신앙으로 각인 (刻印)되었다.

 

가난, 그리고 거기서 태동한 불학(不學)의 고통은

쉼 없이 세찬 파도를 맞아야만 하는 바닷가의 조약돌과도 같은 상처의 연속이었다.

그랬음에 나는 비록 굶고 추울지언정 내 자식들만큼은 잘 먹이고 잘 가르쳐야만 했다.

 

극심한 빈곤과 내가 배운 설움의 세습을 나의 대(代)에서

기필코 끊어 내겠노라는 다짐은 신념, 그 이상의 굳건한 철옹성이었다.

그 결과 우리 동창들은 이제 얼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종착역에 닿았다는 느낌이다.

 

그러하거늘 무려(!) 294명이나 되는 동창생들은

왜 한 날 한 시에 다들 모이지 못 하는 것일까?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유야 다들 있을 터이다.

 

먹고살기가 여전히 대단해서...

아직은 친구들 앞에 나설 정도의 재력(財力이) 없어서...

 

아니면 가정적으로 불행이 있어서...

그러나 그러한 인생 적 굴곡이 없는 친구는 과연 얼마나 될까?

 

개인적인 경우만 하더라도 나는 동창회에의 참석을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그건 내가 못 배웠고 못 살며 뭣 하나 내세울 게 없다는

처절한 자기비하와 자격지심에서 기인한, 그러나 비겁함의 일종이었다.

 

작년 12월의 동창회 송년회 때 처음 나간 것도

실은 당시 회장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대학 동창들과는 차원이 달라!

우린 누가 성공했고 못 되었고를 전혀 따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말이 난 김에 얘긴데 너처럼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산 친구가 또 어딨니?"

 

그 말 한 마디에 결국 나는 수십 년 동안이나 요지부동했던

동창회에의 참석 거부의 마지노선이 결국 무너졌던 것이다.

 

그제 참 보고팠던 동창생은 결국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를 어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으로 흔쾌히 이해하기로 했다.

 

피치 못 할 어떤 형편 내지는 상황에 봉착했을 테지... 라고.

하여간 동창회에 나가보면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수확이 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소중함과 존재감에 대한 계기가 마련된다는 거다.

평소엔 나 자신을 그리도 학대하고 못 났다며

깔보았으되 동창생들은 그리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들은 이구동성과 이심전심으로 진정 내가 잘 되길 원했으며

술 한 잔에도 진솔한 우정까지를 듬뿍 담아 따라주길 마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한 동창회에 나가보면 위로와 격려도 부족하여 존중과 이해의

강물이 넘실거려 그걸 만끽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더라는 사실이다.

 

나는 기억에 없는데 그러나 같은 반에서 공부할 적에

내가 그리도 괴롭혔다는 급우(級友)가 그립다.

첫 직장을 잡았으나 영어를 도통 몰랐기에

일정 기간 나의 '영어 과외 선생'이 돼 주었던 동창도 보고 싶다.

 

선머슴 아이에게 '첫사랑'이라는 환한 촛불을

켜게 했던 그 여학생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

 

다음의 동창회 때는 우리 동창생 294명이 모두 모였으면 좋겠다.

그럼 그 얼마나 신이 날 것이며 아울러 만개(滿開)할

백가쟁명(百家爭鳴)과도 같은 각자 살아온 나날들의

이야기 보따리엔 그 얼마나 가득한 인생의 지혜가 또한 숨어 있을까...

덧붙이는 글 | posco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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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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