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1920년대부터 카렐리아 회랑에 소련의 침입을 저지할 수 있는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카렐리아 회랑은 '라도가' 호수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호수와 울창한 산림으로 이어진 핀란드 국경에서 유일하게 전차가 아무런 방해없이 진격해 들어 올 수 있는 지형으로 이런 지형적 취약성 때문에 핀란드는 이곳에 만네르하임 방어선으로 명명한 방어시설을 건설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만네르하임 방어선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소련군 앞에서 그렇게 큰 역할을 해내지는 못한다.
11월 30일, 엄청난 숫자의 소련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핀란드 국경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접국인 에스토니아에서 이륙한 소련 공군기들은 수도인 헬싱키와 제2의 도시 비푸리에 공습을 가했다. 핀란드군은 소련전차의 엄청난 물량공세 앞에 밀려나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개전 후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핀란드 영내로 8Km까지 진출해 들어왔다. 하지만 그로부터 1주일 후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후방으로부터 중화기를 추진해오기 위해 잠시 진격을 멈쳐버린 소련군 앞에는 엄청난 악몽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진격이 잠시 주춤하자 전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앞에 침체되어 버린 부하들의 사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던 핀란드군의 파보 탈벨라 대령은 호숫가 근처에 소련군 2개 연대병력이 숙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침체된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1개 소대로 기습공격을 계획했다.
한밤중 기습공격을 위해 호숫가를 건너간 핀란드군은 승리감에 도취해 보초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혹한의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보드카를 잔뜩 들이킨 채 늘어져 있던 소련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게 되었고, 이 전투를 통해 자신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전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12월이 되자 기온은 급강하하면서 폭설이 쏟아졌다. 핀란드는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국가로, 온화한 우크라이나에서 징집된 소련군 병사들에게 그 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소련군에서는 동사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반면 혹독한 겨울에 강했던 핀란드군의 혹독한 반격은 겨울이 깊어가면 갈수록 더 활기를 띄었다. 개전초기 핀란드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전차들도 폭설이 계속되자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핀란드어로 모티(Motti)는 장작더미를 의미하는데, 핀란드군은 소련군 대부대를 조직적인 작전이 불가능할 정도의 소집단으로 잘개 쪼개버린 다음 하나씩 각개격파해 나가는 모티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원목에서 보잘 것 없는 성냥깨비로 쪼개져 버린 소련군은 혹독한 추위와 핀란드군의 신출귀몰한 공격 덕분에 불타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모티전술을 통한 핀란드군의 우세는 소련군이 북극권의 혹한에 익숙치 않은 약점을 강력한 공군력의 활용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하고 90만의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추가로 전선에 투입하면서 반전되기 시작했다.
혹독한 추위를 원군 삼아 저항을 벌여 나가던 핀란드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앞에 고전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전황은 핀란드에게 불리해졌고 실탄과 포탄마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핀란드군의 가장 강력한 원군이었던 겨울마저 끝물에 접어들고 있었다. 1939년 11월 30일부터 시작되어 해를 넘긴 1940년 3월까지 계속된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이미 50만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핀란드군 역시 7만여명의 전·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종전
전쟁 초반에 혹독한 자연환경의 도움을 받아 모티전술로 소련군을 끈질기게 괴롭혀 왔던 핀란드군은 그 야무진 저항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궁극적인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애시당초 핀란드군이 이 만큼 버텨낸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핀란드는 임종 직전의 가뿐 숨을 내 쉬고 있었다. 소련군 역시 핀란드의 혹독한 저항에 지쳐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국토의 15% 할양과 철광석, 구리, 망간, 마그네슘 등의 자원을 가져간다는 조건을 건 소련의 휴전제의를 핀란드가 받아들임으로써 1940년 3월 13일 핀란드와 소련의 겨울전쟁은 끝나게 되지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겨울전쟁의 원한을 잊지못한 핀란드는 북유럽에서 유일하게 독일과 손을 잡고 다시금 소련군과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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