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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의사.
수아가 그랬다. 우리가 사는 숲에서 산을 두 개 건너면 해스 숲이 나오는데 거기에 진짜 제대로 된 의사 고양이가 있다고 했다. 그는 마음속의 병까지 고친다고 했다. 미리는 가족에게 당분간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이들도 다 커서 스스로 먹이를 먹을 나이가 되었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친구 수아가 수시로 지켜보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충분히 독립할 나이가 되었다.
아저씨.
마음을 생각하면 아저씨가 생각나고 아저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두근거렸다. 미리는 마음 아저씨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건 고양이 미리가 생각하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미리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 아저씨를 찾아갔다.
며칠 못 본 탓인지 아저씨는 미리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안녕. 오랜만이구나."
마음 아저씨가 미리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서 악수를 하자는 뜻이었을까? 그러나 미리는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악수로 친밀감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저씨는 헤어지는 인사를 하려는 것이었을까? 미리는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어 아저씨의 손 핥았다. 그건 '당신이 좋아요'하는 뜻이었다. 이번엔 얼굴을 부볐다. 그건 '당신을 믿어요'하는 뜻이었다.
"아저씨. 이제 여행을 떠나요. 당분간 여기 못 올 거예요."
아저씨는 미리의 마음을 읽었다.
"어디 떠나는가 보구나."
냐옹.
미리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침 생선찌개가 도착했다. 아저씨는 입에도 대지 않고 미리에게 찌개그릇을 내주었다. 찌개는 너무 뜨거웠다. 곧바로 먹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생선을 그릇 밖으로 꺼내어 주었다. 미리는 꼬리부터 머리까지 뼈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찌개국물은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가장 뜨거웠다. 미리는 눈물을 흘리며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핥아 먹었다. 그건 아저씨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될지도 모를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다.
여행
떠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꼭 죽으러 가는 여행 같았다. 자식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수아가 어서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삐욜라숲은 사막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을씨년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홍수 때 무너져 내린 흙더미가 군데군데 보였다. 숲은 꽤 컸다. 달리다 걸었다 했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진 숲은 피곤만 더할 뿐이었다. 입에서는 마른 모래처럼 흙이 서걱거렸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들쥐 한 마리를 잡았다. 쥐는 비쩍 말라 있었다. 눈망울에 슬픔이 가득했다. 가족이 모두 굶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참이었다고 했다. 미리는 쥐를 놓아 주었다. 꼭 살아서 가족을 지켜내라고 했다. 어쩌면 닭튀김과 생선찌개에 입맛이 변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미리는 그 뒤 쥐를 먹지 않았다.
발걸음을 빨리했다. 산을 하나 넘자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삐욜라 숲 뒤편에 이렇게 큰 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나무들이 울창했다. 꿩이 날개를 치며 날아 올랐다. 밤송이들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미리는 조심조심 산을 넘었다. 땅에 떨어진 은행열매가 보였다. 냄새가 나긴 했지만 저녁식사를 해야 했다. 미리는 코를 막고 은행열매를 먹었다. 밤송이에 비하면 부드러운 열매인데도 가슴 끝이 밤송이에 찔린 것처럼 콕콕거렸다.
가을.
두 번째 산은 가을이 더욱 깊이 들어와 있었다. 바람이 살랑거리자 할 일을 마친 나뭇잎들이 스스럼없이 떨어져 내렸다. 미리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보았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슬펐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바삭바삭 밟히는 소리도 미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가을이 갑자기 싫어졌다. 마음이란 이렇게 바뀌는 거구나. 그게 마음이구나.
미리는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마음이란 좋았던 가을이 싫어지는 것.
마음이란 갑자기 생선찌개가 맛있어 지는 것.
마음이란 갑자기 슬퍼지는 것.
아픔
무언가를 먹는 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작은 열매들도 삼키기가 힘들었고 사과도 완전히 으깨지 않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고통은 쉽게 쉽게 구름처럼 그림자처럼 찾아 왔다. 불쑥불쑥 불청객처럼 찾아왔다가는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다. 아프다고 불청객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손님은 언제나 정중하게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삐욜라숲 고양이들의 예절이었다. 그러니 미리는 이를 꼭 다물고 속울음으로 참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아플 땐 물만 먹을 때도 있었다. 가끔씩 생선찌개를 먹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다. 마음 아저씨도 잘 있는지도 궁금했다.
고통
나무를 집어 삼키는 불기둥에 살갗이 타면 이렇게 아플까? 여우 발톱에 살갗이 찢어지면 이렇게 아플까? 미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도 힘들어했다. 학, 학, 숨을 내쉬기도 힘들어보였다. 고통이란 이름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부터 미리의 오장육부를 뒤틀며 살갗을 후벼팠다.
아파.
미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늘이 노래졌다. 갑자기 땅이 멀어지면서 미리는 가늘어지는 의식을 의식했다. 아, 이렇게 죽는 것이구나. 짧았던 삶이 후다닥 도망치는 고양이들처럼 흩어져 지나갔다. 순식간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인간의 삶을 '인생'이라 부르는 것처럼 고양이의 삶은 '고생'이라 부른다.) 이렇게 허무하고 짧았다니. 미리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허무함에 부르르 털을 떨었다. 차가운 냉기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 왔다. 미리는 침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고통 속에서 차라리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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