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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고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나에게 마흔 정도 나이로 보이는 남자분이 찾아왔다.  옛날에 봤던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제목은 <횃불>. 내게 몇 가지 정보를 줬는데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책 찾기를 의뢰하신 분은, 그 책이 1980년대 초반에 나왔던 것이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만화책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책을 찾느냐고 물었다. 책을 쓰려고 준비 중인데 자료로 삼으려고 한다는 거다. 새마을운동과 전두환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나는 책을 찾아보겠다고 말했지만 이런 책이 어디에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다른 책방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수소문한 끝에 결국 거의 한 달여 만에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찾고 보니 참 익숙한 책이다. 바로 내가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라고 했다.) 다닐 때 여름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썼던 그 책이었던 거다. 반갑기도 했지만 불과 3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그 때 일을 생각하며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다시 <횃불>을 천천히 봤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1983년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즈음이었다.  내가 이 만화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던 때가 말이다.  다시 읽어보니 정말 웃음이 날 정도 내용이다.  코미디이고 개그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진지하게 읽고 방학이 끝난 다음 다른 친구들 앞에서 독후감을 발표도 했던 기억이 난다.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새마을교육도서이다.  당시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은 이것을 읽고 방학동안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했다.(이정민 쓰고 그림)
▲ <횃불>표지 1980년대 초반에 나온 새마을교육도서이다. 당시 국민학생(초등학생)들은 이것을 읽고 방학동안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했다.(이정민 쓰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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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횃불>속으로

만화책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내용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해서 그 운동이 전두환 전 대통령 때까지 왔다는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국민의식을 개혁하자는 내용이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1988년 서울올림픽을 잘 치르기 위해서는 어린이들도 새마을정신으로 정신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책은 총 2부로 나뉜 구성인데, 3분의 1정도가 1부 내용이다. 1부는 1970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정말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농촌과 도시가 함께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놨다고 하는 내용이다. 2부는 본격적으로 이런 새마을 시대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 어떤 정신 상태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2부 내용은 '자연보호', '근검절약',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반공정신' 등으로 돼 있다.  앞서 말했지만 지금 다시 보자니 정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다.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만화책 내용을 보면 과연 좋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보여주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더욱 재밌고도 씁쓸하다. 우선 사회가 안정되고 명랑해지려면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다. '물건 값을 올리지 않고 월급도 올리지 않으면(35p)' 사회는 자연히 안정된다. 물건 값이 십 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여기서는 구체적인 방법도 설명하고 있다. 이 역시 굉장히 단순하다.  국민들 모두가 '물가 오름세 심리'를 갖지 않으면 된다.(36p)  사람들이 물가가 오르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 물건 값은 올라가지 않는다는 논리다.  물건 값이 오르지 않으니 당연히 월급 올릴 일도 없다.  "참 쉽죠잉~"하는 개그우먼의 일그러진 미소가 떠오른다.

물건값도 올리지 않고 월급도 올리지 않으면 그야말로 태평천하!  사회는 안정되고 명랑해진다.
▲ 안정된 사회가 되는 방법 물건값도 올리지 않고 월급도 올리지 않으면 그야말로 태평천하! 사회는 안정되고 명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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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모두가 '물가 오름세 심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면 정말로 물가가 오르지 않게 된다.
▲ 의식을 개혁해야 잘 산다. 국민들 모두가 '물가 오름세 심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면 정말로 물가가 오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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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만 하면 언제나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이런 학생은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된다.(70p)  새마을 정신으로 정신이 개혁되면 국민 모두가 고등학교까지 완전히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대학교 등록금은 극히 적은 돈이다.(134p)  새마을 운동으로 이룩한 복지국가는 참 좋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상교육에 무상의료를 받는다.  집을 한 채 지으면 100년 동안 살 수 있다. 다리를 놓으면 영구적으로 사용한다. 도로를 닦은 다음 가끔 보수공사만 해 주면 수 백 년을 사용한다.(129p)  정말 이렇게 되고 싶은가?  그러면 국민의식을 새마을 정신으로 개혁하면 된다. 그럼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드는 근본이랄 수 있는 의식개혁은 무엇일까?

열심히 공부하면 언제나 좋은 점수를 받고, 그러면 당연히 어른이 되어 훌륭한 사람이 된다.  정말 쉽다.
▲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 열심히 공부하면 언제나 좋은 점수를 받고, 그러면 당연히 어른이 되어 훌륭한 사람이 된다. 정말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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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으면 100년은 문제없이 살수있고 다리를 건설하면 영국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도로를 닦고 가끔 보수만 해주면 영원히 쓸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 복지국가란? 집을 지으면 100년은 문제없이 살수있고 다리를 건설하면 영국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도로를 닦고 가끔 보수만 해주면 영원히 쓸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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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으로 국민들 정신이 개혁되면 복지국가가 된다.  그러면 누구나 돈없이 공부할 수 있고 대학교 등록금은 극히 적은 돈이다.
▲ 정말 부러운 복지국가 새마을운동으로 국민들 정신이 개혁되면 복지국가가 된다. 그러면 누구나 돈없이 공부할 수 있고 대학교 등록금은 극히 적은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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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개혁해야 잘 산다

그것도 어려운 건 아니다. 자기 본분을 모르는 마음을 머릿속에서 없애는 거다. 만화책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돼지코를 붙인 여성이 '난 가수가 될래요' 라고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178p)  노래도 못 부르면서 가수가 되려는 꿈을 갖는 건 자기 본분을 모르는 아주 나쁜 의식이다.  이것을 개혁해야 한다.  그 외에도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마음 - 이런 것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바로 '의식개혁 운동'이다. 

만화책 맨 마지막에는 이렇게 의식 개혁 운동에 동참하는 어린이들의 본보기 일화가 나온다. 거리를 걸어가던 어린이들이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가던 길을 멈추고 똑바른 자세로 선다.  오후에 관공서나 학교 등에서 국기를 내리는 '하기식'을 하는 거다.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어린이는 하기식을 할 때 차렷 자세로 서서 국기가 있는 쪽으로 몸을 향하고 국기가 다 내려갈 때까지 있어야 한다. 내 경우,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동안 속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도록 교육받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로서는 조금 긴 문장이었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지 않으면 선생님께 매를 맞았기 때문에 억지로 외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기 본분을 알고 정직한 생각을 머리에 담고 다른 건 없애면 그게 바로 의식개혁이다.  참 쉽죠잉~
▲ 의식개혁이란 이런 것 자기 본분을 알고 정직한 생각을 머리에 담고 다른 건 없애면 그게 바로 의식개혁이다. 참 쉽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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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개혁이 되어 국가에 충성하는 어린이는 이런 모범을 보인다.  <횃불>만화책 맨 마지막 장면이다.
▲ 국가에 충성하는 어린이 의식개혁이 되어 국가에 충성하는 어린이는 이런 모범을 보인다. <횃불>만화책 맨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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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30년 후

지금은 이 만화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던 때로부터 약 30년 정도가 흘렀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다. 그동안 대통령이 여럿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정권도 많이 바뀌었다. 만화책에 이름이 등장한 대통령은 통장에 이십 몇 만원 밖에 없다는 말로 유명해졌다.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지만, 대통령직을 마친 분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이 '의식개혁'만큼은 국가에서 발 벗고 나서며 강조했던 것이었다. 국민들 머릿속에 국가가 말하는 것을 집어넣고 개인의 고유한 생각이나 가치관은 무시했던 암흑 같던 시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 정도가 흐른 지금은 어떤가? 나도 이제 몇 년 후면 마흔 살이 된다. 초등학교 때 일은 정말 먼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게 그렇게 멀지않게 느껴진다. <횃불>만화책에 있던 내용들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로 반복된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국가가 방송을 견제한다. 신문을 견제한다. 책에 쓴 내용이 국가를 욕하는 내용이면 작가를 감시하고 활동을 못하게 막는다. 연예인이 방송에서 하는 말이 국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에 그를 끌어내린다. 연예인뿐이 아니다. 방송사 사장, 신문사 사장 등도 예외가 아니다. 시민단체 역시 국가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하거나 반대하는 말소리를 내면 철저하게 매장시킨다. 

심지어 정당이라고 할지라도 국가에 잘못 보이면 인터넷 서버 같은 걸 압수해간다.  그러면서 TV로, 신문으로 계속해서 국민의식을 개혁하라고 내보낸다. '힘내라 대한민국', '잘 될 거야, 문제없어', '대한민국은 바르게 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구로 장식된 것을 국민들로 하여금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작업들이 한창이다. 이건 <횃불>만화에서 나왔던 그대로다. 국민 전부가 '물가 오름세 심리'를 갖지 않으면 실제로 물가가 오르지 않을 거라는 논리 말이다.

과연 대한민국은 바르게 가고 있는 걸까? 혹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만하면 생각대로 되는 것일까? 긍정의 힘이 모든 걸 다 긍정적으로 바꿔 줄 것인가?  애석하게도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현실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소설 무대가 아니다. 물론 간절하게 원하면 된다는 믿음 - 이건 정말 중요한 자기 암시다.  '긍정'은 우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건 개인보다 국가가 한 수 위다. 국가가 하는 게 결국 모두 긍정으로 가는 것이라는 믿음, 결국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는 폭력과 강제. 사실은 이게 국가를 멍들게 하는 원인이 아니고 뭘까.  2010년 2월. 지금은 1983년 어느 여름방학과 다르지 않다.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이거 정말 씁쓸하구만!"


태그:#횃불, #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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