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올해 창간 10주년 기획의 일환으로 국내 10개 진보싱크탱크들과 공동으로 '지방선거 10대 어젠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삽보다 사람'이라는 주제가 붙은 이번 기획을 통해 거대 담론보다는 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과제를 구체적으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계획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네요."10일 오전, 택시 기사는 좁은 언덕길을 오르는 택시의 액셀을 밟으며 혀를 내둘렀다. 대전역을 출발할 때 기사는 "5분이면 대동종합사회복지관에 갈 수 있다"고 밝혔지만, 15분이 넘도록 택시기사는 길을 헤맸다.
복지관이 있는 대전시 동구 대동 산 1번지는 산기슭에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빼곡히 모인 '달동네'다. 택시 기사조차 길을 잃는 곳. 서울이었으면 '잿빛' 재개발로 한창 시끄러웠을 터지만, 이곳은 조용했다. 오히려 옹벽에 그려진 화사한 그림들이 택시를 맞았다.
마을 곳곳에서는 철거를 앞둔 집들이 보였다. 복지관에서 만난 김현채 관장은 "빈집을 헐고 그곳에 '한 평 공원'을 마련하고 있다"며 "대동에서는 낙후된 주거지역을 강제 철거한 후 고층아파트를 짓는 서울식 재개발 모델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들은 재개발 안 해도 살기 좋은 동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길을 잃은 재개발은 대전에서 길을 찾았다. 바로 대전시의 '무지개 프로젝트'다.
철거 안해도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 수 있을까?
지난 2006년 9월부터 대전시청에서 진행하고 있는 무지개 프로젝트는 노후주택 밀집지역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살기 좋은 마을로 가꾸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동 등 다섯 곳에 988억 원의 예산을 들여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여러 가지 복지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단계 사업 대상지역으로 선정돼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진행된 대동 산 1번지는 대전의 대표적인 취약계층 주거지역이다. 기초생활수급자 등 취약계층이 전체 주민의 53.8%다. 주택도 많이 낡았다. 이곳 45㎡ 규모 주택의 월세는 보통 보증금 100만 원에 월 10만 원. 폐가로 방치되는 것보다 낫다며 돈 내지 말고 살라는 집주인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다.
주민 송난영(38)씨는 "얼마 전까지, 마을은 폐가가 많아 삭막했고 골목마다 쓰레기가 널려있어 지저분했다"며 "산꼭대기에 있어서 눈 내리면 차가 들어올 수 없고, 이웃들끼리 교류도 없는 아무도 오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었다"고 전했다.
무지개 프로젝트 1년 후, 동네의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삭막한 옹벽은 그림판으로, 버려진 땅은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버려진 동네는 골목길의 정취가 남아 있다며 사진가들이 몰리는 아름다운 마을이 됐다. "집 내부도 깨끗한 벽지를 붙이자 화사해졌다"고 송씨는 말했다.
보육시설이나 공부방도 확충됐다. 송씨는 "예전에 아이를 공부방에 맡겨도 4시간만 맡길 수 있고 교사도 전문성이 없었다"며 "공부방이 지역아동센터로 확장된 이후 밤까지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마을의 변화가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이뤄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시청 공무원, 복지관 직원들과 함께 '무지개 마을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마을을 직접 디자인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마을 가꾸기 사업 일자리를 제공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백옥임 추진위원장은 "재개발로 동네가 바뀌면 주민들이 동네에서 쫓겨나는데, 여기서는 주민들이 뿌리내리고 정착하면서 스스로 동네를 꾸미고 있다"며 "무지개 빛깔처럼 동네가 좋아졌다"고 밝혔다.
임대-분양 아파트 주민 간 벽 허문 '무지개 프로젝트'
무지개 프로젝트를 통한 대덕구 법동 한마음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지난 1992년 입주한 한마음 아파트(36.3㎡)에는 새터민, 독거노인 등 1770세대가 살고 있다. 주민의 절반이 기초생활수급대상자다. 주변의 고급아파트로 둘러싸인 한마음 아파트는 그동안 높은 벽과 가시덤불로 인해 도시 속 외딴 섬이었다.
대전시와 대전도시공사는 2008년부터 한마음 아파트에 대해 리모델링에 가까운 시설 개선 사업을 벌였다. 곰팡이가 슨 장판·벽지 등을 모두 교체하고 화장실로 새로 바꿨다. 아파트 복도에 창문을 달고 아파트 벽면을 다시 칠했다. 벽을 허물고 버려진 땅을 공원과 놀이터로 꾸몄다.
주민 황미숙(39)씨는 "아이들이 주변의 대형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집으로 거의 데려오지 않았고, 그동안 아이가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것에 대해 상처받을까 봐 신경이 많이 쓰였다"며 "하지만 이제는 아파트가 깨끗해져서 아이가 친구들을 잘 데려온다"고 밝혔다.
한마음 아파트 주민들간의 소통과 교류도 늘었다. 새터민 이영희(52)씨는 "4년 동안 살면서 이웃과 한 마디도 안하고 지냈다"며 "밝아진 아파트 환경과 아파트를 가꾸기 위한 다양한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이웃들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법동종합사회복지관 김성자 부장은 "주민들이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던 감옥 같은 담장이 사라져 속이 시원하다'고 한다"며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물리적 시설 개선뿐 아니라 공동체 복원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무지개 프로젝트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갤럽이 무지개 프로젝트 대상 지역 주민 1500명을 대상으로 추진상황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69.7%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시민사회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금홍섭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공공이 나서서 낙후된 지역을 재생시키는 것은 옳은 길"이라고 말했다.
욕망의 도시 서울의 재개발, 대전에서 길을 찾다그렇다면, 무지개 프로젝트는 '욕망의 도시' 서울에서도 재개발을 대신할 수 있을까? 사실 대전 등 지방은 재개발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는 탓에 주민들 스스로 재개발을 부르짖지 않는다. "내 땅을 왜 재개발 못하게 하느냐"는 주민들의 비판이 크지 않다. 서울의 재개발 지역과는 상황이 다르다.
'사회적 배제 해소'라는 무지개 프로젝트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곽현근 대전대 행정학부 교수는 "당장은 서울식 재개발의 대안모델이 되긴 힘들다"며 "예산 확보, 주민 참여 확대, 대전시-자치구 협력 체제 강화 등 앞으로 과제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개발논리가 판치는 사회에서 지방정부가 나서 주민들과 함께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꾸미는 것은 대안 재개발의 단초가 되는 작지만 소중한 출발"이라고 밝혔다. 금홍섭 사무처장 역시 "단체장이 개발이 아닌 사람을 정책의 중심에 놓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무모한 재개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무지개 프로젝트는 전국적인 히트상품이 됐다. 매월 전국 지자체 공무원들과 대학 연구팀이 대전시청을 찾는다. 또한 무지개 프로젝트는 2008년 해외에서 열린 국제지역벤치마킹대회, 세계사회복지대회에서 우수시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지개 프로젝트의 앞날은 어떨까? 이날 만난 한 주민의 말에 답이 있다.
"'삽'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발을 부르짖는 후보는 더 이상 주민들의 표를 얻지 못할 것이다. 대신 사람을 말하는 후보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