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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흰 구름, 그리고 화장실.(탄자니아)
▲ 아, 아프리카 파란 하늘, 흰 구름, 그리고 화장실.(탄자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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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도시 하라레를 탈출하는 날이었다. 하라레는 한 나라의 수도이면서도 거리는 텅 비어 있고, 멀쩡한 청년들이 대낮에도 버스터미널 근처를 건달처럼 복작거리고, 지폐 다발을 한 가방씩 넣고 다니면서도 정작 시장에서는 살 물건이 없는 이상한 도시였다.

여행자라곤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던 이 도시는 일주일에 물가가 두세 배씩 뛰는, 오늘 월급으로 받은 지폐다발이 언제 종이뭉치로 전락할지 모르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사흘을 보냈다. 그리고 떠나는 날, 노란색 고무 밴드로 묶은 지폐 네 다발을 손에 쥐고 버스에 올랐다. 그러니까 지폐다발은 2년째 여행 중이던 아내와 나, 그리고 겨울방학 동안 여행에 동행하고 있던 누이와 11살 먹은 조카의 버스 요금이었다.

"삼촌…"

조카의 난감한 목소리. 버스는 아침부터 시큼한 땀 냄새와 함께 현지인들로 꽉 들어차있었다. 보통 아프리카 버스들은 한 줄에 의자가 다섯 개로 개조되어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좁을 수밖에 없는 중간통로는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드디어 좌석에 앉다.(짐바브웨)
▲ 만원 버스 드디어 좌석에 앉다.(짐바브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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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한 것이다. 택시비를 싸게 해준다던 호스텔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자리 걱정 말라며 데려다준 곳은 터미널이 아니라 호스텔과 가까운 간이 정류장이었고, 좌석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차장은 그 틈을 비집고 차비를 걷으러 다녔다. 상상할 수 있을까. 차장이 어깨를 가로지르는 큼직한 가방을 둘러매고 지나가면, 사람들은 그 긴 팔들을 뻗어 한 뭉치씩의 돈다발을 내미는 풍경. 우주여행이라도 가는 걸까, 백만장자들이. 그런 상상을 하며, 나 역시 한 손에 쥐기도 힘든 네 다발의 버스요금을 자랑스레 건네준다. 

이제 생존해야할 시간. 엉덩이를 밀어붙여 누이와 조카 두 사람을 겨우 앉히고 나니 아내와 나는 꼬박 서서 가야할 형편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린 그날 하루 동안 펼쳐질 고생길을 다 알지 못했다. 버스는 호스텔 사장 말과는 달리 '빅토리아 폭포'가 아니라 하라레와는 겨우 중간 지점 정도인 '불라와요'가 종점이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온 네 명의 여행자는 할 수 없이 미니버스로 바꿔 탔다. 버스는 12인승이지만 20명이 넘도록 꾸역꾸역 끼워 태우는데 크지도 않은 내 엉덩이가 사각형으로 변할 지경이었다.

세상 어디나 늘 활기찬 곳 (탄자니아, 잔지바르섬)
▲ 시장... 세상 어디나 늘 활기찬 곳 (탄자니아, 잔지바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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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콜란도토)
▲ 전통놀이 ...(탄자니아, 콜란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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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 감기까지 들어 콧물은 흐르고 사기당한 가슴은 부글부글 끓는데 조카는 배고프다고 보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게소 상점에는 유효기간이 1년도 더 지난 과자 몇 봉지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잘 달려가던 버스가 시동이 꺼지기를 두어 차례. 이제 배고픔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오늘 안에 무사히 도착해주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그래도 창밖으로는 한결 같은 아프리카 풍경이 이어졌다. 파란 하늘. 누가 그림이라도 그려놓은 것 같은 뭉게뭉게 흰 구름. 듬성듬성 벌판에 선 우산 나무들. 엉성해 보이는 옥수수 밭, 흙벽의 초가집들 그리고 맨발의 아이들…….

다시금 버스는 시동이 꺼져 '흐왕개'라는 마을에 멈춰 섰다.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한 여자아이가 망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버스 창밖에 서있다. 어깨 끈 하나가 떨어진 티셔츠에는 '시드니 올림픽'이라 적혀있고, 막대기 같은 두 팔 위로는 어깻죽지가 삐죽 솟았다.

아이는 망고 하나 사라고 외칠 수도 있으련만,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만 깜박이고 있다. 누이가 창밖으로 망고를 한 아름 산다. 아이는 한 다발도 아닌 한 장의 지폐를 받고도 거스름돈을 줄 수 없어 어찌할 줄을 모른다. 누이는 몇 개의 망고를 더 집어 드는 것으로 그걸 대신한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버스는 여전히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불라와요'에서 우리보다 2시간이나 늦게 출발했다는 대형버스가 도착했다. 결국 차장은 정비를 포기하고 승객들에게 버스를 바꿔 타라고 했다. 요금은 자기가 대신 지불하겠다며.

파란 하늘, 흰 구름, 우산 나무...그리고...(탄자니아)
▲ 한결 같은 풍경 파란 하늘, 흰 구름, 우산 나무...그리고...(탄자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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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버스에 오르며 오늘의 불운은 이것으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 차장이 차비를 다시 걷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외국인인 우리들만 빼고는 모두 차비를 직접 환불해줬다는 것이다.

"으아~ @#$%&  나쁜 놈들!!"

드디어, 하루 종일 참아왔던 분노가 터지고 말았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지기를 뱉어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운전사가 운전대를 180도 돌렸다. 그리곤 왔던 길로 쏜살같이 내달리는 것이다. 승객들도 술렁거렸다. 네 명의 동양인 여행자의 억울한 사정은 순식간에 버스 전체로 퍼져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흔들어대며 운전사, 아니 '정의의 기사'를 응원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벼르던 상습범들을 때려잡는 형국이랄까. 그날 버스 안의 풍경은 만화영화 주인공이 악당을 잡으러 가는 클라이맥스처럼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우리들의 정의의 기사는 도중에 경찰서에 들러 정복경찰까지 대동하고서 아직 차를 수리 중이던 녀석들의 뒤쪽에 은밀하고도 날렵하게 버스를 갖다 댔다. 그리고는 멋지게 녀석들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요놈들, 한국 사람들 요금 떼먹었지?"

당장 환불하라는 불호령에 상황파악을 녀석들. 그 중 한 녀석이 억울한 듯 더듬거리며 하는 말,

"하, 한 명은, 어, 어린이 요금…"

사실 난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지만 짐짓 모르는 척 그를 외면했다. 불라와요에서 버스를 타기 전 흥정을 해서 조카 요금을 반값으로 깎아 지불했던 것이다. 녀석들은 억울하다고 하소연 했지만, 어쩔 것이냐, 경찰의 호통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승객들의 야유를 이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우린 어른 네 명 분의 요금을 돌려받았다. 이제 버스 안은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그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한명 한명 우리 가족에게 축하의 악수를 청해왔다. 그러는 사이 해가 지고 창밖으로 노란 달이 떠올라 바오밥나무를 비추고 있었다.

휴우, 이런 거대함이라니! (짐바브웨)
▲ 빅토리아 폭포 휴우, 이런 거대함이라니! (짐바브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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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차장이 와서 곧 빅토리아 폭포에 닿을 거라고 알렸다. 참으로 길고도 긴 하루였다. 아마도 짐바브웨에서 가장 힘들었던 하루였지 싶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내 기억 속에는 가장 행복했던 하루로도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여행이 가진 매력 아닐 는지….

덧붙이는 글 | 지금부터 연재할 기사는 2003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아내와 함께 967일 동안 세계 47개국을 여행한,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때 만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로 출간했지만,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그동안 월간 <행복한 동행>에 연재해 왔는데, 이를 다소 수정하고 덧붙여서 연재할 계획입니다.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아프리카여행, #짐바브웨, #빅토리아폭포, #길은사람사이로흐른다, #버스추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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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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