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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조(개성을 실현할 권리) :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다. 특히 학교는 두발의 길이를 규제하여서는 아니 된다.'

지난 10일 발표된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최종안 12조는 '두발과 복장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모두 48개 조항으로 구성된 최종안에는 휴대전화 소지 허용, 체벌 금지, 야간 자율 학습과 보충 수업 선택권 등과 같은 내용도 담겨 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에게 보고된 이 최종안이 경기도의회에서 심의·의결된다면 학생들은 더 이상 두발 규제를 받지 않아도 된다. 교복을 입을지 여부도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학교별로 결정된다. 교육청 차원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학생인권조례' 보고 '드라이클리닝' 떠오른 이유 

KBS <개그콘서트> '드라이클리닝'
 KBS <개그콘서트> '드라이클리닝'
ⓒ 드라이클리닝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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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한 치수 작게 입은 교복, 거기에 찢어진 스타킹까지. '복장 불량' 여고생 홍인규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윤형빈과 김지호가 혀를 끌끌 차며 나타난다. "야, 학생이 이거 복장 불량하게. 야, 안 어울려." 이어서 이종훈의 랩이 시작된다.

"학생이 머리에 염색이 말이나 되는 소리.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걸 모르고 있다니. 너희들의 지금 모습은 <남자의 자격> 윤형빈."
"그게 대체 뭔 소리?"
"완전 어색해. 하하하하."

이어지는 윤형빈의 훈계.

"야. 고등학생 기간은 끽해야 3년, 성인은 50년이야. 나중에도 다 할 수 있어. 너 나중에 후회한다. 학생은 학생다운 게 제일 예뻐."

국내 최초의 학생인권조례 최종안을 보면서 KBS <개그콘서트>의 '드라이클리닝'이 떠오른 건 왜일까.

지난해 12월 20일 시작된 이 코너는
'왕비호' 윤형빈을 주축으로 한 '드라이클리닝' 3인방이 '불량청소년' 홍인규를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코너 이름 드라이클리닝은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 특히 김지호의 개그('니가 말하는 ∼가 ∼는 아니겠지')는 요즘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7일 방송에서는 '불량청소년'이라는 한정된 소재에서 벗어나 성형중독자를 소재로 외모지상주의를 꼬집기도 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 '학생은 학생다울 때 제일 예쁘다'?

KBS <개그콘서트> '드라이클리닝'
 KBS <개그콘서트> '드라이클리닝'
ⓒ 드라이클리닝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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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송의 담배 피우는 청소년부터 일진, 복장 불량, 음주, 게임, 야동 그리고 아이돌 '팬질'까지, 드라이클리닝이 '지적질'하는 청소년의 모습은 다양하다. 홍인규가 연기하는 이러한 청소년들은 불량하고 학생답지 못한, 따라서 지도 편달이 필요한 대상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잠깐, '드라이클리닝'의 훈계를 들어보자.

"학생이 담배를 피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얼굴 썩어 이도 누래 완전 폭싹 썩었어."
"학생이 피어싱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걸 모르고 있다니."
"학생이 술을 마시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공부할 시간에 술 마시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공부할 시간에 게임만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학교도 안 가고 게임만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하루 종일 연예인만 쫓아다니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공부도 안 하고 연예인만 좋아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밤새도록 야한 것만 보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시간 낭비란 걸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

개그프로그램이지만 '드라이클리닝'은 웃음만 추구하지 않는다. 교훈도 함께 주려 한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 '학생은 학생다울 때 제일 예쁘다'라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이다. 덕분에 '드라이클리닝'은 웃음과 교훈을 함께 준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백은선씨는 <개그콘서트> 시청자게시판에 "요즘 학생들의 잘못된 부분을 짚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좋아요"라며 "불량학생들이 귀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장은지씨 역시 "코미디가 교훈적이면서도 재미있기가 쉽지 않은데 요즘 청소년들에게 따끔한 충고와 교훈도 주시고 또 재미까지 주셔서 정말 너무 감탄하고 있답니다"라는 의견을 남겼다. 

"학생들한텐 신체의 자유, 개성 발현의 자유도 없나요?"

하지만 '드라이클리닝'이 주는 '교훈'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드라이클리닝'이 '학생다움'에 학생들을 가두려 하면서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태우씨는 시청자게시판에 "학생들의 모습을 일괄적으로 규제하려는 행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듭니다"라는 생각을 밝혔고, 자신을 예비 고2 여학생이라고 밝힌 오경민씨는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한다', 이런 거창한 말을 붙이지 않아도 저희의 활동범위를 공부로 좁히려고 억누르는 거 같아요"라는 글을 남겼다. 오씨는 "아주 나이 많은 보수적인 어르신들도 아니고 학교 졸업한 지 몇 년 안 된 젊은 코미디언들이 이러니까 더 웃기네요"라며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앞서 언급한 '복장 불량'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드라이클리닝'이 청소년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시청자 김종선씨는 '드라이클리닝 인권침해'라는 제목의 글에서 <개콘> 제작진을 향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따졌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두발 자유는 기본권이라고 인정했는데 학생은 사람 아닌가요? 지나가는 학생들 잡아서 물어봐요. 학생답게 머리 자르고 복장 제대로 갖추는 게 옳은 거냐고. 십중팔구 아니라고 대답할 걸요. 학생다움이 뭔데요? 왜 어른들이 정해놓은 모습에 학생들이 따라야 하죠? 신체의 자유, 개성 발현의 자유 이런 거 학생들한테 없나요? 이런 소재로 개그하면 스트레스 받고 피해 보는 건 우리라구요."

유슬기씨도 "무작정 자기보다 못하거나 어린 사람들에게 훈계하는 느낌"이라며 "학생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이 빨리 깨져야 할 악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기분 나쁜 개그 소재"라고 밝혔고, 이제 중3이 된다는 이금희씨는 "저번 여름방학에 염색을 하고 개학한 뒤 풀었는데, 부모님이 방송을 보시다가 저를 혼냈습니다"라는 웃지못할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두발 자유=탈선'?... 한국 사회의 '드라이클리닝'

지난 1월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서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조례 제정에 대한 토론자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있다.
 지난 1월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서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조례 제정에 대한 토론자들의 토론을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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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학생들을 선도하고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비단 '드라이클리닝'뿐만은 아니다. 중·고교생의 두발 자유를 인정하라는 5년 전 인권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두발 규제는 여전히 곳곳의 학교에서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인천의 한 중학교는 학생 두발 단속 과정에서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 이발을 해, 인권위가 이를 인권 침해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에 학교 측은 "학교가 인천 관내 공단 근처에 있는 등 학생들이 유혹과 탈선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어 학생의 두발과 복장에 대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두발 규제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두발 자유를 탈선과 연관 짓는 것은 보수언론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17일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발표되고 나서 며칠 후에 나온 <조선일보> 데스크 칼럼(2009년 12월 25일)을 보자.

'…(중략)…예컨대 머리 모양과 교복 자율화의 경우 학생들에게 자유와 개성의 중요성은 가르칠 수 있겠지만 학교의 적절한 규제와 감독의 필요성은 깨닫게 하지 못할 것이다. 문란한 외모와 복장은 자칫 비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면학 분위기를 깨뜨릴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선 학교의 적절한 규제와 감독이 필요하다는 또 다른 이치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성공회대학교 인권평화센터팀(팀장 진영종 교수)이  중·고생 10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장 시급히 개선돼야 할 학교의 인권침해 사례로(3가지 복수선택 가능) 24.8%가 두발 규제를, 18.7%가 복장 규제를 꼽았다. 강제 과잉학습이 15%, 단체기합 및 체벌이 9.0%로 그 뒤를 이었다. 중·고생들은 체벌보다도 두발과 복장의 규제를 더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지난 4일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특강에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보호가 교문 밖에서 멈추지 않고 교문 안에서도 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김상곤 교육감의 말처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보호가 교문 안에서도 흘러',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한 치수 작게 입은 교복, 거기에 찢어진 스타킹을 신어도 '문란한 외모와 복장'이 아닌 '개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올까.


태그:#학생인권조례, #드라이클리닝, #김상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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