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을 기억하며 2010년 내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군데군데 녹색 동그라미가 보이는데 합해봤자 고작 5개가 넘지 않는다. 새로운 나를 만드는 2010년이 될 것이라며 굳은 마음으로 새해 계획을 세웠던 1월 1일. 희망찬 계획을 모두 행동으로 옮기는 날에는 초록색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리겠노라 했었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나 이렇게 보잘 것 없다.
그렇게나 비장한 각오로 계획했던 많은 일들 중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야식을 절대 먹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엄마는 유달리 맛있는 음식들을 밤에 만드신다. 훌라후프를 하루 1000개씩 돌리겠다고 했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랑니의 통증과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며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의지박약을 지나치게 탓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었던 내 상황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해야지, 하는 생각에 반성을 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계기를 맞이하니 바로 음력 설, 구정이다. 책 많이 읽기, 운동하기, 체중 감량하기 등 그 내용은 언제나 똑같지만 특히 2010년 구정을 맞아 지난 1월 1일에 가장 큰 각오로 결심했던 영어 공부에 대해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진다.
지난 해 11월 태국 배낭여행 당시 짧고도 짧은 내 영어로 몹시 곤란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기본 회화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배낭여행자의 한 마디가 큰 충격을 주기도 했고! "너 그 영어로 어떻게 여행을 다니니, 정말로 신기하다!"
불타는 영어 공부에 대한 의지와 요란한 준비 과정
그리하여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책장 맨 구석에 박혀있던 2003년도에 구입하여 6과까지만 온갖 색깔의 볼펜으로 치장되어 있는 기초 영어책 1권과 2009년도 9월에 구입하여 2과만 공부했던 EBS 영어회화 책을 꺼내었다. 서둘러 EBS 방송 다시보기를 결제하고 기초영어도서에 있는 카세트 테이프도 찾아서 먼지를 털어냈다.
앗, 그러나 나의 카세트 플레이어는 이미 고장난 지 오래다. AS를 맡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쇳뿔도 당김에 빼라는 말이 있는데 AS를 맡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나의 이 굳은 마음이 흔들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난 지갑을 챙기고 집 근처 마트를 찾았다.
2층에 자리 잡은 전자 제품 매장에서 가격대비 최고의 품질인 제품을 찾겠다며 내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요리조리 둘러 보기 시작했다. 찾는 제품의 조건은 집 안 어디서든 들고 다니며 들을 수 있게 크기도 작고 가벼울 것, 얄팍한 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가격은 5만 원 안으로 구매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고르다보니 48.900원 내외의 가격으로 CD, 카세트, 라디오까지 청취할 수 있는 일명 포터블 카세트가 눈에 들어왔고 과감히 구입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포터블 카세트를 집으로 가져온 나는 벌써부터 다음 배낭여행지에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얼른 2011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연두색과 흰색의 조화를 이룬 내 사랑스런 포터블 카세트를 보자 내 봄이 화사해 질 것 같다는 생각에 고쳐서 쓰면 될 것을 또 뭔가를 사왔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신이 나기만 했다.
그런데 사온 첫 날부터 영어 테이프를 재생시키면 그건 포터블 카세트에게 극도의 부담감을 주는 것 같아서 먼저 태국에서 사온 라운지 계열의 CD를 최대 볼륨으로 틀어놓았다. 이어폰으로 듣는 것과는 역시 확연히 다르다. 오랫동안 잊고 잊었던 음악듣기의 재미가 다시 떠오르며 한껏 흥이 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본래의 구입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다음 날부터 난 하루 1시간씩 영어 교재를 펴놓고 회화도 따라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한없이 부족한 내 녹색 동그라미가 말해주듯이 이 공부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포터블 카세트에서는 영어 회화보다는 각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바빴다. 이렇게 보낸 시간이 어느 새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어버렸다.
이제 정말 새해가 왔다. 내일부터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영어공부를 하고 책상에 교재를 펴놓지 않더라도 회화 테이프를 틀어놓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까지만 맘껏 음반을 듣자.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내년 이맘때쯤이면 적어도 내 의사는 영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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