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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 전시장입니다. 숫자가 너무 많다보니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기 전까지는 그 가치를 잘 몰랐던 것이죠. 영암역사문화연구소를 설립한 뒤, 김병모 교수를 초빙해 고인돌 관련 강의를 했더니 한 선배가 '집 마당에 널린 게 고인돌인데 뭐가 보물이냐'며 따지더라고요. 하하하."

유 총재는 세계거석문화협회를 설립해 고인돌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유인학 총재 유 총재는 세계거석문화협회를 설립해 고인돌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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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인돌을 지난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 올린 주역인 '세계거석문화협회' 유인학 총재는 고인돌 관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하자 호탕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뿌듯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의 웃음에서 여유와 자신감이 함께 느껴진 것은.

유 총재의 고인돌 사랑은 지난 1990년, 김병모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가 "소중한 유산인 우리의 고인돌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에 자극돼 시작했다. 그날 이후 유 총재는 김 교수와 환상의 짝꿍으로서 국내외 거석기념물 전문가들을 만나며 고인돌 세계유산 등재 작업을 추진했다.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은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 총재의 추진력'과 고고학에 매진하던 '김 교수의 고증력'이 맞물리며 세계유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장의 심장을 멈추게 할 뻔 했던 '고인돌'

유 총재는 지난 1990년부터 서남해안 고인돌의 가치를 인식하고 보호운동에 들어갔다. 1995년에는 고인돌 연구와 보호를 위해 '고인돌 선돌협회'를 창립했으며, 1998년에는 세계유산 추진을 위해 선돌협회를 사단법인화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세계거석문화협회'를 결성해 고인돌의 세계유산 등재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유인학 총재를 아는 지인들은 그를 일러 '유인돌'이라고도 한다. 도대체 고인돌을 향한 유 총재의 애정은 어디까지일까.

유 총재와의 인터뷰는 매서운 칼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지난 1월 13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약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시간은 1998년 8월 여름으로 돌아간다. 유 총재는 고인돌 권위자인 루브르 박물관장 '장 피엘 모앙' 박사 등을 초청해 고인돌 알리기에 나섰다. 이때 모앙 박사는 우리의 고인돌을 보며 "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김병모의 고고학여행>은 모앙 박사의 당시 소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럽 고인돌과는 다른 면이 많네요. 아주 많이 남아 있고 한군데에 밀집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수백 개의 고인돌이 한 마을에 남아 있는 곳은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잘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고인돌 유적지 부근에는 이 같은 채석장이 존재하고 있어 자연을 보존하는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한다.
▲ 전남 화순의 채석장 고인돌 유적지 부근에는 이 같은 채석장이 존재하고 있어 자연을 보존하는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한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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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12일, 유 총재는 고창·화순·강화의 군 관계자들을 비롯해 세계거석문화협회 추진회원들과 함께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로 이어지는 유럽 답사를 마친 유 총재는 곧바로 '세계거석문화협회'의 깃발을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협회 구성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유 총재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외교부장관에게 문화협력 업무로 각국 대사관들을 총동원하는 외교훈령을 보내달라고 한 뒤, 각국의 고고학회 회장과 고인돌 연구원 등을 초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2월 7일 드디어 세계 35개국 대표들과 해외 석학들을 모셔와 세계거석문화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유 총재가 '거석문화 국제심포지엄'을 연 것도 이 즈음이었다. 호주, 포르투갈, 벨기에, 인도, 베트남, 일본, 인도네시아 등의 전문가들이 서울에 모두 모여 각 지역의 거석기념물들을 소개하며 비교, 토론했다.

고인돌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문화외교의 쾌거

유 총재가 협회와 심포지엄 등을 통해 인연을 맺어 놓은 거석문화 전문가들은 향후 국내 고인돌 현지 시찰과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위촉을 받은 일본 큐슈대학의 '니시타니 다다시' 교수는 우리 고인돌을 시찰해 작성한 보고서에서 "세계적으로 희귀하게 잘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기념물"이라고 고인돌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니시타니 교수의 이 보고서는 2000년 6월 28일 파리 유네스코본부의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유 총재는 "유네스코는 로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유네스코 세계유산 시험을 치르는데 공부 잘하는 학생한테 평범한 문제를 낸 격이었다"며 웃었다. 이미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충분히 검증을 받아 고인돌의 등재를 자신했다는 것이었다.

고인돌이 세계유산에 지정된 이면에는 유 총재 같은 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흘린 숱한 땀방울들이 배어 있다. 유 총재가 고인돌의 우수한 가치를 해외 전문가들에게 직접 체험하게 한 것은 문화외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쾌거였다.

한편, 유 총재는 고인돌을 세계유산으로 추진함에 있어 난감했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정치를 했던 사람에게 정치적인 압박이 가해져 온 것이다.

"DJ정부 시절 외교부를 통해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고인돌이 고창과 화순 등 전라도에 치중됐으니 세계유산을 나중에 추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칫 호남의 역차별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던 그 때, '경주역사유적지구'를 고인돌에 앞서 세계유산에 올리기로 하고 밀어붙였습니다. 2000년 12월에 경주유적과 고인돌이 차례로 세계유산이 된 배경입니다."

"고인돌에 이야기의 상상력을 불어넣자"

수천 년 전 세워진 고인돌과 최근 문명의 결과물인 위성안테나가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문명의 발전과 자연의 보존이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 전북 고창의 ‘장독대 고인돌’ 수천 년 전 세워진 고인돌과 최근 문명의 결과물인 위성안테나가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문명의 발전과 자연의 보존이 함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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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총재는 고인돌 세계유산 등재를 마무리 한 뒤 이번에는 북한 지역의 고인돌을 세계유산에 추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 2002년 유 총재는 북한의 초청으로 KBS <역사스페셜>팀과 함께 북한 지역의 고인돌을 둘러봤다. 이후 금강산에서 다시 만나 세계유산 추진회의를 열기로 약속했는데 이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남 장흥·고흥의 고인돌과 북한의 고인돌을 묶어 세계유산에 추가하기로 한 계획은 미국의 돌발 행위로 멈추게 됐습니다. 부시가 '북한은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고인돌을 매개로 한 학자들 중심의 남북한 문화교류가 교착상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북한은 지난 2004년 '고구려 고분군' 단 1건만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렸을 뿐이다. 고인돌은 북한에게나 우리에게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 총재는 "첫 등재가 어렵지 추가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며 조만간 북한의 고인돌을 세계유산에 등재할 것을 자신했다.

유 총재와는 인터뷰 이전에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유 총재가 주변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노라면 마치 역사학자나 국문학자를 떠올리게 했다. 해박한 역사 지식과 풍부한 문화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내는 그의 말솜씨는 어지간한 이야기꾼은 상대가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유 총재가 고인돌에 주목했던 이유도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리라. 유 총재는 "고인돌에 상상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며 말을 맺었다.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분석되는 우리 고인돌은 부족의 운명을 건 대역사를 보여줍니다. 채석장의 존재는 전문가집단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노예의 숫자도 엄청났을 겁니다. 그래서 수천 명이 함께 모여 사는 국가형태를 갖췄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앞으로 고인돌마다 '핑매바위'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야기 보물창고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멋지지 않습니까?"


태그:#고인돌, #유인학, #세계문화유산, #세계거석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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