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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동생 꿈을 꾸었습니다. 엄마는 동생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 게 좋지 않은 거라고 했지만, 요즘 동생 생각을 많이 하다보니 그럴 거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동생 안부를 물었습니다. 차마 말은 내뱉지 못하고, 눈가에 눈물만 그렁그렁해졌습니다. 친구 앞에서 눈물은 보였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눈시울은 금세 붉어질망정 사람들에게 동생 얘기를 꺼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조금씩 담담해져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니었습니다.

설날 아침, 엄마와 언니와 함께 동생이 있는 절을 찾았습니다. 지난 추석 이후 거의 넉달만입니다. 절로 가는 한 시간여 동안, 이런 저런 농담을 했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 마음은 잔잔했고 여느 때와 같은 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절, 법당 문을 열었습니다. 저 멀리 동생의 영정사진이 보였습니다. 노란색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동생의 그 모습이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 동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많이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나는 괜찮지 않았고, 아직 6개월 전 그때 그 슬픔 그대로였습니다. 

사진 속 동생은 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웃고 있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도 하고, 미안한 듯 바라보는 듯도 하고, 씁쓸해하는 것도 같습니다. 내가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동생의 표정은 바뀝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영정사진 속 동생이 그때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잘 압니다. 나도 동생도 이 사진이 동생의 영정사진이 될지 몰랐지만, 동생은 내 앞에서 포즈를 잡았고, 행복해했고, 나는 그런 동생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동생, 이게 영정사진이 될 줄 몰랐습니다

내가 찍고 내가 고른 동생의 사진
 내가 찍고 내가 고른 동생의 사진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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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재발하고 항암치료를 다시 받는 중에 떠났던 둘만의 일본여행, 우리는 즐거웠습니다. 동생과 나만이 아는 사진을 찍었던 그 날의 기억, 사진을 찍었던 그 곳,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 분위기...

동생을 장례식장으로 보내고, 나는 영정사진을 고르러 집으로 갔습니다. 책상 서랍을 뒤져 동생이 인화해 놓았던 모든 사진을 꺼냈습니다. 행복했던 동생, 비록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신나게 살았던 동생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동생의 영정 사진을 찍었고, 직접 사진을 골랐고, 그리고 결국 사진앞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법당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동생 사진을 바라보면서 지난 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동생과 나눴던 마지막 대화는 새벽 네시에 걸려왔던 동생의 전화였습니다. 언제 병원에 올 거냐고 물었고, 몸이 더 나빠지는 것 같다고, 눈에 초점이 점점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3일이었습니다. 그 통화 이후 동생과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동생은 나를 알아봤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고개짓은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가끔씩 찾아오는 통증에 아파했습니다. 그리고는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주 편안하게, 그러나 너무나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보냈던 마지막 7일을 아주 자세히 적어나갔습니다. 단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잊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작은 숨소리 하나, 손짓 하나, 고갯짓 하나까지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언제든 그때의 기록을 꺼내 읽으며 내 동생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동생의 마지막 7일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5년 전 봄날이었습니다. 그때 오마이뉴스에 처음 글을 올렸던 저는,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시민기자강좌를 신청했습니다. 강의료가 5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루도 결석하지 않으면 그 강의료를 다시 되돌려준다고 했습니다. 강의를 2번 정도 들었을까, 동생이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동생과 서울에서 둘만 지내고 있던 터라 저는 정신이 없었고, 병실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 주 정도는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참 우습게도 강의료 5만원은 돌려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에 전화를 했습니다. 동생 이야기를 하고, 어쩔수 없이 한 주는 결석해야 한다고 했고, 한 주 결석하지만 돈은 돌려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약속대로 그 주만 결석을 했고, 오마이뉴스는 돈 5만원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쩔수 없이 아픈 동생을 떠올리면 오마이뉴스가 생각이 났고, 오마이뉴스를 떠올리면 동생 생각이 났습니다. 내게 오마이뉴스는 동생의 투병과 함께 시작되었으니까요.

2년전 봄에는 오마이뉴스 <가족인터뷰>응모에 동생 인터뷰 기사를 올렸습니다. 동생을 앉혀놓고, 둘이 킬킬거리며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글이 <우수작>에 뽑히면 상금을 5:5로 나누자고 했습니다. 실제로 동생 인터뷰 기사는 <우수작>에 뽑혔고, 상금으로 받았던 20만원을 각 10만원씩 나눴습니다. 또 <음식은 남기는 게 미덕?>이라는 글을 쓰면서는 직접 패밀리레스토랑에서 남은 음식 사진을 찍어다준 동생에게 원고료 일부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틈틈이 동생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서 동생은 떠났고, 나는 이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동생 이야기를 쓰지 말자고 생각을 합니다. 

동생이 없는 고향집에서, 동생의 물건을 하나 둘 꺼내보다 동생이 끼던 반지를 꺼냈습니다. 그 반지를 왼쪽 가운데 손가락에 끼었습니다. 친구는 그 반지가 동생반지라고 말해주자, 이제 동생을 보내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글을 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지니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이미 동생을 많이 떠나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전혀 동생을 보내지 않았다는 걸 알았고, 아직도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압니다. 동생이 없는 고향집이 익숙해지고, 동생이 없는 명절이 당연해지는 날이 온다는 걸요. 언젠가는 일찍 우리 곁을 떠난 동생 얘기를 담담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어쩌면 먼 훗날 나의 아이들에게 동생 얘기를 추억하며 들려줄 날도 오겠지요.

덧붙이는 글 | 동생은 4년 4개월의 암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8월 2일 늦은 밤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동생은 29년 8개월을 우리와 함께 보냈습니다.



태그:#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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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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