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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의,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든 그들은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 땅의 최선이었고 그 세월의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존중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이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 신영복의 '더불어 숲' 일부 발췌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 올티가스 시. 공정여행에 참가한 14명의 사람들이 다름 아닌 이 곳의 한 사립학교에서 첫 날 일정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었다. 우리와 함께 필리핀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을 가질 유네스코 필리핀 위원회 솔리벤 대사가 올티가스 시의 한 사립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립학교에 방문한 참가자들의 모습.
 사립학교에 방문한 참가자들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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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부터 전문대학까지 있는 사립학교, 1년에 수백만원이 든다는 이 곳은 한국에 여느 학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빌리가 사는 '바공 실랑안'의 한 초등학교는 지난 여름 닥친 태풍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수재민 센터로 여태껏 쓰이고 있었는데, 조나가 사는 '바세코'의 하나 밖에 없는 공립학교는 앉을 자리도 없이 빼곡한 학생들이 오전오후 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10명 남짓한 아이들이 한 반을 이룬 이 곳에서 빌리는 내게 나즈막히 속삭였다.

"일단, 참가자들이 필리핀은 무조건 못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리고 지나가다 필리핀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지역들을 눈으로 봤으니,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하지도 알거고요. 그런데, 여기 오니 조금은 억울하네요."

그럴만했다. 여행의 수익금으로 빈민지역에 대학생을 여행에 참가시킨다는 결정한 뒤, 이들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을 찾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학교의 담장은 더 없이 높고, 장총을 찬 채 정문을 지키는 사설 경비의 모습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필리핀의 현실을 이렇게 마주칠 수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고, 솔리벤 대사는 "여행이 지속가능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여행하게 될 이푸가오 지역의 계단식 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에 맞추어 이푸가오 지역에 지원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이런 오리엔테이션에 대해 대전 평송수련원에서 근무하는 조성임(28) 참가자는 "여행자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뒤 많은 파괴로 신음하는 계단식 논은 어떻게 관리되는가에 대해 듣고자 했지만, 어쩐지 유네스코 필리핀 위원회는 계단식 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것 같았다"고 느낌을 밝혔다.

다섯 군데 계단식 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푸가오 지역은 수도인 메트로마닐라와 버스로 12시간이 떨어진 지역, 지역 사무실이나 상근 직원이 없는 지정의 효과는 자부심을 가질만큼 컸지만,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이후 방문하게 되는 NGO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은 이런 모습에 대해 비판하곤 했다.

이푸가오 지역에서 산사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빠르면서도 무리하게 이루어지는 도로공사는 이푸가오족의 편의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관광객을 위주로 진행된다고 사람들을 입맞춰 얘기한다.
 이푸가오 지역에서 산사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빠르면서도 무리하게 이루어지는 도로공사는 이푸가오족의 편의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관광객을 위주로 진행된다고 사람들을 입맞춰 얘기한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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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니, 세계 8대 불가사의니. 계단식 논이 그렇게 불리기 전까지 우린 먹거리를 자급자족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여행객들이 들락날락 거리면서 젊은 사람들은 힘든 농사일은 내팽개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업에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여행객을 대상으로 하는 숙소들은 대부분 돈 많은 외부인이 운영했고, 그 수를 예측하기 힘든 여행객들이 창출하는 일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무너진 농업시스템 탓에 먹거리 가격은 폭등을 하고, 우리는 모두 빈곤해지는 꼴을 가져왔죠. 정부는 여전히 많은 돈을 들고 오는 여행객들을 위한 도로와 편의시설을 만드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산을 두어 개 넘고, 몇 시간이 걸려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는데 말이죠."

촌부는 누가 무지하다 했을까? 바타드에서 만난 한 농민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이런 문제 의식은 때론 위험할 수 있다. 도시에서 사는 이들은 기술의 혜택을 보며 편하게 살아가면서, 이들의 선택을 무조건 비판한다는 게 어거지기 때문이다.

다만 49.1%에 이르는 서비스업 종사자(2008년 필리핀 통계연감 참조)가 이촌향도를 거쳐 이 직군으로 옮겨왔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2000년대 들어서 필리핀의 루손섬 북부 중심도시 바기오에서 벌이진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 몇 번 전염병이 돌곤 했습니다. 큰 인명피해가 있던 적은 없었는데, 그 때마다 여행객의 발길은 말 그대로 뚝 끊겼죠. 도시 전체가 굶주린다고 표현하면 맞을까요? 생각해보니 화가인 나도 여행객이나 와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여행객이 오지 않으면 땅이 있어도 밥을 먹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더군요."

공정여행을 함께 고민하던 '탐아완 마을'의 예술인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이런 말을 내게 건넸다. 농담 반 진담 반, "너는 나의 밥줄이다"라고 덧붙이며 호탕하게 웃는 그들은 어렸을 적, 최소 먹는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그때만 해도 필리핀은 식량을 자급할 수 있었던 탓이다.

단순히 계단식 논을 지켜보며 감탄하고 있는 것은 그 곳을 찾은 이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의 여행은 역설적으로 이곳 공동체를 뿌리부터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우리가 그 곳을 보고 받는 감동만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움직임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것은 봉사활동이 아닌, 우리가 치러야할 당연한 대가라고 여겼다. 그래서 여행객들이 찾지 않는 버려진 계단식 논에 가서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노인들 밖에 없는 논에서 모내기를 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이푸가오 족의 축제 모습. 지금은 관광객이 방문하여 지갑을 열지 않는 이상 구경하기 힘든 일이 되버렸다. 누군가 인심 좋은 사람이 마을에 방문하여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날, 그 날이 이 곳에 축제날인 셈이다.
 이푸가오 족의 축제 모습. 지금은 관광객이 방문하여 지갑을 열지 않는 이상 구경하기 힘든 일이 되버렸다. 누군가 인심 좋은 사람이 마을에 방문하여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날, 그 날이 이 곳에 축제날인 셈이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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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고, 너네 나라 돌아가서 사람들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만드려고 하는 거구나. 우리가 전통의상 입고, 공연하는 사람도 몇 명 불러다가 줄께. 대신 일당은 아주 후하게 쳐줘야 한다"

이푸가오 한 농민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농민의 반응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채 여행을 한 우리들의 책임이었다. 이런 이들에게 '돈만 안다'느니,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다'느니 등의 말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행위라는 것을 우린 알아야만 한다.

복잡한 심경의 첫 날, 신영복 선생님의 말대로 여행을 통해 원주민과 여행자가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여행 역시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들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산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
NGO 아시안브릿지 필리핀은 2010년 1월 12일 ~ 1월 18일까지 필리핀 루손섬 북부 이푸가오 지역에서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선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위의 기사는 당시 있었던 여행의 내용으로 쓰인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BS 유포터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공정여행, #필리핀, #대학생, #아시안브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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