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사 전공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종성 선생의 최근 저작 <한국사 인물통찰>(역사의 아침 펴냄)은 한국사에서 주요하게 화제가 되고 있는 18인 인물의 폄하와 찬사를 되짚어 보는 새로운 시각의 인물분석서다.
저자의 서문에는 이런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중국의 춘추시대 초나라의 영윤(총리)을 3번 지낸 '투곡어토'를 두고 공자의 제자인 자장이 스승에게 묻는다. "투곡어토는 어떠십니까?" 공자는 "충성스럽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자장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질다고 할 만합니까?" 공자의 대답은 "알 수 없다. 어찌 어질다 할 수 있겠느냐?" 투곡어토가 충성스러운 인물임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어진 인물로까지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제나라의 대부 진수무에 대해 자장이 공자에게 질문했다. "진수무는 어떠십니까?" "깨끗하다" 자장이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질다고 할 만합니까?" 이번에도 공자의 대답은 같았다. "알 수 없다. 어찌 어질다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진수무가 깨끗한 인물임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어진 인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충성됨이나 깨끗함 같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상대적인 것들일 뿐만 아니라 내면을 둘러싸고 있는 외면적인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종성은 한국사의 주요인물 18명을 그저 스쳐지나가듯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신숙주, 이황, 김옥균 같은 인물들과 커피나 술을 한잔 하며 그들의 참모습을 느끼는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책을 집필하게 된다.
책의 시작을 여는 인물은 고구려의 장수태왕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고구려의 군주 장수태왕은 그의 부친 광개토태왕과 함께 고구려를 중국의 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키운 왕으로 우리에게는 늘 강한 모습만으로 비쳐졌다. '그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려졌을 것'이라는 말을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도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북위에 43회나 조공을 바칠 정도로 머리를 숙인 인물이었다. 아니! 대고구려가 그것도 강성한 시기였던 장수태왕 시절에 조공을 했다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조공은 반드시 약소국이 강국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조공은 일종의 무역으로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찾고자 하는 무역 행위와 정치적으로 강대국에게 인사를 하는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장수태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강력하지 못했던 고구려를 지켜내고, 중국과의 교역을 늘려 백성과 왕실의 살림을 늘리는 데 신경을 쓴 것이다. 또한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구려의 국력은 중국에 비해 강대하지 못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두 번째 인물은 고려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요나라를 물리친 지혜와 덕을 지닌 인물로, 현대사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국의 인물로 크게 부각되어 우리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강감찬은 고려의 인물을 넘어 동북아 삼국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귀주대첩에서의 승리는 이후 약 250년 동안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도록 하였으며, 강감찬의 전승으로 형성된 국제질서는 그만큼 견고하고 강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안보제일주의 노선에 따라 고려의 영웅으로만 만들어 버렸다. 큰 시각에서 보면 동북아의 평화에 미친 그의 힘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국 안의 인재로만 격하시킨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음은 공민왕이다. 흔히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고 정치적인 허무에 대리인 신돈을 내세워 나라를 망친 인물로만 그려져 있다. 하지만 신돈이 정권을 잡은 1개월 만에 영도첨의 이하 대신들을 파면, 축출하고 대간들을 장악한 것을 보면, 공민왕의 사전 준비와 조종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의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 한국에서 총리가 거의 같은 일을 하지만, 잘못이 있으면 총리만 책임을 지는 구조와 비슷하여, 사실 신돈은 보이지 않는 공민왕의 노련한 정치술수에 놀아난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즉 공민왕은 남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은 이성계로 그는 조선인이 아니라 여진족 출신의 엘리트였다는 주장이다. 쌍성총관부의 이자춘의 아들로 선대에 전주에서 살다가 여진족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여진족이었던 이성계가 왕이 되면서 역으로 조선인인 척하면서 선대의 역사를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4대조 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기생을 잘못 건드려 목사와 불화가 생겨 삼척~의주~이성~알동으로 도망을 가 여진족의 부하로 살게 되었다는 논리는 유목민들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농경민들은 아무리 지주가 이주를 한다고 해도 170여 가구 동시에 같이 이주하는 일은 없으며, 4대조 이상 조상에 대한 이야기는 신빙성이 거의 없는 것도 증거라는 것이다.
또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도 조선어에 약했던 이성계의 후손들이 조선의 사대부와는 차별성이 있는 언어를 만들기 위함이었고, 개국 이후 100년이 넘도록 사대부들이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민족에게 충성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경우도 그를 서민의 편에 선 개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도전이 말하는 백성의 범주는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신진사대부와 지배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대군의 경우에는 원래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동생을 경쟁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동생에게 기울고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는 다음에는 철저하게 복종하고 우애를 강조하는 인물로 후세에 의해 양보하는 미덕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 측면이 강하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양보할 양(讓)자를 쓰는 양녕이라는 대군호 역시도 그가 세자에서 물러난 다음, 부친이 내린 대군호로 그의 체면과 후세를 생각한 부친의 뜻이 더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신숙주의 경우, 배신에 능한 인물로 세상이 알고 있지만, 그는 타고난 외교관으로 동북아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할 줄 알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와는 동갑내기로 죽이 잘 맞는 친구와 같은 모습을 보였으며, 세조의 치적을 완성하는 데 큰 공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연산군의 경우에는 살인을 일삼고, 여색을 밝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왕의 장자로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 왕재로 교육을 받은 조선사에 몇 안 되는 정통성을 지닌 왕으로 등극을 했지만, 양반 사림세력의 강력한 견제로 패배한 왕이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연산군이 즉위한 무렵의 왕실은 재정이 파탄 지경이었고, 양반들이 사회적 권위와 지식뿐만 아니라 토지를 전부 장악하고 있고, 이들을 무시하고는 도저히 국정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연산은 개혁을 위해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칼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기록하는 양반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된 것이다.
퇴계 이황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를 학문에만 전념한 군자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는 늘 관계를 들락거린 소인이었다고 분석을 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벼슬이 정2품의 판서 정도였던 것은 그의 정치적 능력이 생각보다는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학문을 하면서도 늘 상소정치를 통하여 중앙과의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임금이 고관대작을 맡기기에는 능력이 부족했고, 또한 일을 그만두게 하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다 보니, 언제나 관직을 오가는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어려울 때면 사직을 하고 좋은 시절에는 벼슬을 하는 그를 높이 쓰기는 곤란했지만, 때때로 올라오는 상소를 통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신하를 쓰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평생을 야인과 관직을 오가며 지낸 것이다.
또한 광해군의 경우 실패한 역사적인 죄인이기도 하지만,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와 개혁을 추구한 군주로서의 모습도 있으며, 효종과 함께 북벌을 논했다고 하는 송시열의 경우에도 실은 북벌이라는 대의명분만을 가지고 권력을 유지한 측면이 강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 후기 조선중흥의 르네상스를 이끈 천재 군주 정조의 경우에도, 그의 개혁과 인물됨을 일국적인 차원에서 보면 성공한 측면이 있지만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국과 일본에 치여 3등을 유지한 정도에 그치며, 그의 죽음으로 조선은 이미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고 분석을 하고 있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선교를 하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온 측면보다는 프랑스의 앞잡이로 서양세력의 조선 진출을 도운 사탄 마귀와 같은 존재로 처형을 당한 측면이 강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를 죽인 조선정부는 그의 죄목을 선교에 걸지 않고, 프랑스의 조선 진출을 도운 도우미로 보았다는 것이다.
흔히 강력한 쇄국주의자로 알려진 흥선대원군의 경우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국제친선에 매달린 인물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쇄국론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쇄국을 통하여 내치를 다진 다음 문을 여는 것이 조선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의 아들인 고종의 경우에는 열국을 조선에 불러 그들끼리의 경쟁을 통하여 조선이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을 버리면 된다는 생각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명성황후는 시아버지를 농락하고 남편을 치마 폭 안에 감싸 안고 조종하던 인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명석함과 적극성을 소유한 고종의 절대적인 후원자로 살다가 죽은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고종 또한 최후까지 살아남아 개혁을 하려했던 노련한 정치인이었지만, 이미 기울어져가는 배의 선장에 불과했던 것 같다고 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옥균의 경우 실패한 혁명가로만 평가를 받고 있지만, 고종과 이심전심으로 반청을 실현하기 위해 친일과 친러를 오갔던 정치인으로 조선의 마지막 개혁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사 인물통찰>을 집필한 김종성 선생은 진보적 시사월간지 <말>의 동북아 전문기자,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 동북공정과 독도 등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그의 날카롭고도 파격적인 평론은 선풍을 일으켰고, 북핵문제에 관해서도 지속적인 주목을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19세기 동아시아 통상관계와 한중 관계사를 연구하고 있다. 동북공정 기사와 사극 기사로 <오마이뉴스> 특별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주요 저서로 <동북아 코드> <동북아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사 클리닉>이 있고, 번역서로는 <김정일의 한의 핵전략> <십자가를 짊어진 휴전선 승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