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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드디어 그날 우리 동네에 핀 고사리꽃을 보게 되었다.
난 드디어 그날 우리 동네에 핀 고사리꽃을 보게 되었다. ⓒ 서진석

내가 삼각산에서 그 이상한 불빛을 보던 날까지, 토끼는 그냥 그렇고 그런 토끼였다. 설마 그게 정자 휘호에서 튀어나온 토끼였다 해도, 그것은 나에게 말을 거는 법도 없었고, 그리고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상기를 시켜주었고, 난 간간히 나타나는 그 토끼를 보고는 막연히 반가워하기만 했다. 단지 나와 함께 있다가도 누군가 나타나면 어떻게 알고 바람 같이 사라지는, 그 짧고 귀여운 꽁지를 가진 동물과 더욱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그런 귀여운 동물들과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마치 곰인형 가지고 놀듯 안고 쓰다듬어준다거나, 끌어안고 같이 잠을 자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시절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어머니 때문에 집으로 데려와 끌어안고 자는 일은 불가능했다. 무슨 병을 옮길지도 모르지만, 또 엄마가 그토록 싫어하는 무당 아주머니가 기르는 토끼라는데.....

 

토끼는 그 사실을 아는 듯, 그냥 내게 자기 등을 쓰다듬어줄 기회를 조금 준 다음, 누가 골목길에 나타나기 전에 휑 하고 사라져버렸다. 아마 우리 동네에서도 누군가 나처럼 그 토끼랑 노는 녀석이 있겠지 생각하며 그냥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 그 토끼가 내게 특별한 의미가 된 계기가 있었다, 그 토끼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에 갓 들어간 여덟 살 무렵 아버지와  삼각산 정자로 불현듯 떠났던 소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삼각산 소풍은 수도 없이 가본 나였지만,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불러 삼각산 정자 위로 데리고 가셨다. 그냥 아주 무더웠던 어느 여름. 손님이 도통 들지 않는 가게 문을 닫고 아버지가 타고 다니시던 꼬마 오토바이를 타고 그렇게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정자 위로 나를 데리로 올라가신 아버지는 잠시 휘호를 둘러보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용수야. 저 글자, 네 할아버지가 쓰신 거다."

 

그날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날이었다.

 

"그런데 저 현판을 쓰시고 바로 돌아가셨어."

 

"묘연정이 뭐야, 아빠?"

 

"나도 몰라. 한자를 봐야 알겠는데, 할아버지가 이미 돌아가버리셨으니 여쭤볼 수도 없고. 그런데 현판 글씨 멋있지?"

 

아버지는 마치 자기가 직접 쓰신 글씨라도 되는 것처럼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며 여덟 살 아들에게 자랑을 하셨다. 아마 아빠가 직접 쓰셨다고 해도 그렇게 멋진 현판이 나왔겠지만. 나는 으스대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저기 구석에 있는 토끼도 할아버지가 그린 거야? 시장 아줌마가 그러는데, 저 토끼가 만날 밤마다 나와서 시금치를 훔쳐먹고 간다던데."

 

물론 나는 그 시장 아줌마를 알지 못한다. 일호 형이 했던 말을 돌려 이야기했을 뿐이다.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을 토끼이지만 아빠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방 알아차리셨다.

 

"저 토끼를 할아버지께서 그리셨겠니? 시간이 지나고 비랑 눈을 맞으면서 저렇게 변한 거겠지."

 

하지만 잠시 그 토끼 그림이 있는 쪽을 쳐다보시다가 다시 말을 이으셨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그리셨을 수도 있었겠다. 할아버지가 토끼를 굉장히 좋아하셨거든."

 

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고백을 하는 양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저런 토끼 우리 동네에서 봤는데……"

"저런 토끼들은 시골에나 살지, 우리 동네엔 없다. 만약 동네에 나타나면 차에 치이거나 당장 사람들이 잡아먹어 버리지."

"아냐, 나 진짜 저 토끼 우리 동네에서 봤는데… 엄마랑도 그때 시장 갔다오면서 분명히 같이 봤었는데."

"시장에서 도망쳐 나온 토끼겠지……."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셨다. 그런데 그렇게 어머니와 같은 말을 하셨지만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아주 다른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나도, 어른들은 다 그렇게 똑같이 생각을 하시나 보다,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울 엄마가 그거 무당 아줌마가 키우는 토끼라고 했는데....'

 

이 말이 바로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나 왠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토끼가 나타나면 아버지에게 꼭 보여드려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날 아버지는 정자에서 금방 내려오시지 않으시고 한참을 서서 아버지가 어린 시절 즐겨 그리셨다는 논 위에 지는 붉은 노을만 바라보셨다. 아버지는 그날 평소에는 보여주시지 않으시던 모습도 보여주셨다. 담배를 피우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졌고,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시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거의 산을 다 내려오신 아버지는, 무심결처럼 한마디를 내뱉으셨다 .

 

"이번 여름엔, 고사리들이 무성하겠네."

 

난 아버지가 말씀을 하신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소나무 줄기 밑동에서 고개를 숙인채 자라고 있던 고사리들 사이에 무언가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고사리가 고개를 숙여서 만드는 주머니 같은 것 한가운데에 마치 반딧불이 반짝이고 지나간 듯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금방 꺼져버렸다.

 

아버지도 그 모습을 보신 것이었을까? 나는 순식간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들뜬 감정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 얼굴에서는 그 어떤 놀라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저기 무언가 반짝하고 빛나는 거 아빠도 본 거지?'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또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하지로구나. 얼른 가자, 엄마가 기다리겠다."


#고사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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