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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3월 풍경은 늘 소란스럽다. 신입생들에게는 학교의 모든 것들이 낯설겠지만 재학생들의 경우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나는 같은 캠퍼스에서 벌써 아홉 번째 맞는 3월이지만 이 무렵의 풍경은 항상 흥미롭고 또 항상 낯설다. 그 소란들은 대개 '강의'와 관련된다.

우선 3월에만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는 수강신청과 관련 있다. 듣고 싶었던 강의에 수강신청을 하지 못한 학생들은 끊임없이 수강신청시스템에 드나들며 빈 자리가 나기만을 고대한다. 두 번째 3월의 풍경 중 하나는 '여전히(!) 낯선 강의실'이다.

신입생들에게는 캠퍼스 곳곳의 모든 것들이 낯설겠지만, 재학생들에게는 결코 예외는 아니다. 몇 시간에 걸친 등산 끝에 나오는 '이 산이 아닌가봐'라는 탄식은 그나마 나은 것이리라. 강의 시작 시간은 임박했는데 건물을 잘못 찾아온 학생들은 뛰고 또 뛰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는 강의교재이다. 이맘때면 되면 꼭 서점은 늘 붐비는 것 같고, 학생들이 꾸려놓은 게시판에서도 중고 서적들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모든 게 지갑사정과 관련되겠지만, 한 학기 강의를 들으면 펴볼 일 없는(?) 책일 텐데 값이 만만찮다. '왜 하필 이렇게 비싼 책을 강의교재로 선택했담!'이란 말이 저절로 나온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제부터 정보 검색전이다. 먼저 인터넷에 접속하여 가격을 꼼꼼히 비교한다. 다음 수업 전까지는 받아볼 수 있는가, 배송은 무료인가 등등 따져볼 것도 많다. 그러다보면 '잘못된 선택'도 나오기 마련이다.

너무도 섹시한 인류학 서적?

츠츠이 야스다카의 <인간동물원> '인류학 서적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실제 책은 일본의 SF소설이다.
츠츠이 야스다카의 <인간동물원>'인류학 서적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실제 책은 일본의 SF소설이다. ⓒ 북스토리
어느 수업을 수강할 때였다. 강의계획서를 살펴보니 교재가 무려 7권이다. 대충 따져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그리고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그 뒤를 따른다.

이제 '실전' 정보 검색전을 시작할 때이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이다 '아싸'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인간동물원>이란 책을 주문할 때였다. 어느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을 다른 사이트에 비해 무려 3천원이나 싸게 팔고 있었던 거다. 생각할 겨를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에 품절되거나, 가격이 변동될 수도 있으니. 일단 주문 클릭!

며칠 후, 드디어 책이 도착했다. '아, 책이나 먼저 읽어둘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평소에 안 하던 예습을 왜 생각했을까 모르겠지만 일단 책을 펼쳤다. 우선 목차를 봐둬야 하지 않겠는가? '음~~' 각 장의 소제목들이 아주 그럴 듯하다. "나르시시즘, 욕구불만, 우월감, 사디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최면암시, 게젤샤프트, 게마인샤프트, 원시공산제, 의회제 민주주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근대도시 …" 등등의 순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였다. 두 번째 한 페이지를 읽고 있을 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밝고 명랑한 얼굴. 조금 못생기긴 했지만, 내 취향에 꼭 맞는 얼굴이었다. 눈 아래에는 주근깨까지 적당히 깔려 있었다. 서몬 핑크빛의 도톰한 입술은 내 가슴을 마구 고동치게 했다. 촌스런 가정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멋진 육체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은 그다지 크게 부풀어 오르진 않았지만 …"
― 츠츠이 야스다카, 양억관 옮김, <인간 동물원>, 북스토리, 2004, p.10.

'○○○ 선생님이 이 책을 왜 교재로 선택했지?'라는 생각이었다. 도무지 평소에 알던 교수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한 페이지 더, 한 페이지 더 …,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갔다. '분명 도시와 관련된 인류학 서적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뭐, 이것도 인류학이라면 인류학이겠지만 아무튼 뭔가 이상했다.

성(性)과 관련된 발언은 끔찍이도 싫어하시는 분이 이런 책을 왜 선택했는지 이해가 안 갈만큼 책의 내용이 섹시한 것이었다. 몇 페이지 더 넘기니, 노골적인 성적 표현들이 등장한다. '아, 이거 정말 뭔가 이상하다. 아니면 사람이 변했던가'라는 생각이 든 건 채 몇 페이지를 더 넘기기도 전이었다.

아뿔싸! 강의계획서를 다시 살펴보니, 교수님이 선택한 교재가 <인간 동물원>인 것은 맞다. 문제는 교수님이 선택한 교재가 전혀 다른 저자가 쓴 책이라는 데 있었다.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라는 영국의 동물학 박사가 쓴 <인간 동물원>이 강의계획서에 올라와있는 교재였는데, 츠츠이 야스다카(筒井康隆)라는 일본의 소설가가 쓴 같은 제목의 SF 단편집을 잘못 구입한 것이었다.

부화뇌동, 그러나 또 하나의 즐거움을 주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인간 동물원> 바로 이 책이 강의계획서에 올라온 '진짜 강의교재'였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인간 동물원>바로 이 책이 강의계획서에 올라온 '진짜 강의교재'였다. ⓒ 물병자리
흔히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고 하던가(부화뇌동의 사전상 의미는 '자기 생각이나 주장 없이 남의 의견에 동조한다'이다). 가격 비교에만 몰두하다가 제목만 같은 전혀 다른 장르의 책을 구입한 것이었다.

소설 <인간 동물원>을 구입할 때 가격이 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두 책의 정가가 본래 2500원이 차이였고, 나는 크게 할인도 받지 못한 책을 구입하면서도 혼자 기뻐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데즈먼드 모리스가 쓴 책을 다시 주문했다. 그리고 며칠 후 도착한 진짜 교재를 폈을 때는 이런 내용을 먼저 읽을 수 있었다.

"현대 생활의 압박이 날로 커짐에 따라,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는 도시 거주자들은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세계를 흔히 콘크리트 정글로 표현한다. 이것은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공동체의 생활방식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방법이지만,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진짜 밀림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가나 이 사실을 확인해줄 것이다."
― 데즈먼드 모리스, 김석희 옮김, <인간 동물원>, 물병자리, 2003, p.18.

현대 생활, 인구밀도, 도시공동체… 이 얼마나 따분한 단어들의 나열인가. 게다가 '연구'라는 말이 주는 저 은근한 압박감이란! 결국 몇 푼 아껴보겠다고 '부화뇌동'한 탓에 나는 책 한 권을 더 산 꼴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츠츠이 야스다카의 책을 반품하지 않았다. 딱히 SF소설에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책을 반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책을 반품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종종 즐거움을 준다. 성(性)과 관련된 발언을 끔찍이도 싫어하시는 교수님이 노골적인 성적 표현들이 즐비한 소설을 펴놓고 수업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수업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신가? 위에 인용한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 내용과 비슷했다면 대답이 될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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