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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위의 작은 라퓨타(Laputa ; 공상에 잠긴 인간들이 사는, 공중에 떠 있는 섬) 고르마스.
 동산 위의 작은 라퓨타(Laputa ; 공상에 잠긴 인간들이 사는, 공중에 떠 있는 섬) 고르마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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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이었지만 여느때와 달리 밖은 두터운 캄캄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묵직한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밀리언 스타스 호텔'인 승합차를 고르마스(Gormaz)로 몰았다. 고르마스는 스페인 소리아(Soria)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언덕 맨 꼭대기에는 고르마스 성의 잔재가 버티고 있다. 8세기 무렵 아랍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 성은 390m의 길이에 28개의 탑을 가졌는데, 당시 서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성은 거친 바위와 자갈들로 이루어진 언덕 위에 세워져 당시 외부에 그 위력을 마음껏 과시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외벽과 몇 개의 탑들만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마을을 아우르며 서 있는 성의 늠름함은 여전한 듯했다.

바위 옆에 세워진 에르미타 '산 미겔 드 고르마스'.
 바위 옆에 세워진 에르미타 '산 미겔 드 고르마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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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중턱쯤에는 커다란 바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 바위 밑을 안식처와 벗 삼듯 작은 에르미타 하나가 서 있었다. 에르미타의 이름은 산 미겔 드 고르마스(San Miguel de Gormaz). 12세기에 세워진 작은 에르미타로 에르미타 내부에 그려진 벽화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에르미타의 위치와 생김새는 사진사 세바스티안(Sebastian Schutyser)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드라마틱한 구도의 바위와 에르미타를 어떻게 뷰파인더 안에 잡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찰나의 예술 사진... 인화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마을 위를 뒤덮은 심상치 않은 구름.
 마을 위를 뒤덮은 심상치 않은 구름.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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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된 동안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구름. 인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진다.
 노출된 동안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구름. 인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진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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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 세바스티안은 불길한 구름들을 마을 전체 위에 서서히 모으고 있는 하늘을 오랫동안 주시했다. 해는 이미 마을 한가운데를 향해 오르고 있었지만 두꺼운 구름은 그 빛을 치밀하게 가리고 있었다. 마을은 바람이 실어온 짙은 구름에 가려졌다가 잠시 햇살을 받아가며 색과 느낌을 시시각각 변화시키고 있었다.

마을 위의 구름들이 점점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자 세바스티안은 핀홀 카메라와 사다리를 설치하고 빛의 양을 재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카세트(한 카세트 안에는 두 장의 대형 네거티브 필름이 들어 있다) 안에 담긴 네거티브를 모두 소비하고야 세바스티안은 사다리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변화하는 빛의 하늘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었다. 사진이란 찰나의 예술이지만, 언제 어느 시점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지는 사진이 인화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기에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최고의 짧은 순간을 사진으로 보이기 위해 사진가들이 소비하는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길고 버겁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만 영원할 뿐

고르마스 성.
 고르마스 성.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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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마스 성의 잔재.
 고르마스 성의 잔재.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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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마스 언덕 위에는 많은 사건들과 전쟁, 혹은 사랑 이야기도 새겨져 있을 것이다. 수많은 스토리를 그대로 간직한 듯 언덕은 그렇게 조용히 바람과 회색 구름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성을 짓던 노예들과 그 성을 마음껏 누리던 귀족들, 성을 파괴한 적군들과 이후 에르미타를 세운 수도자들까지…. 고르마스 언덕은 수많은 이야기를 모으는 특별한 곳이구나, 그리고 지금 우리가 또 다른 이유로 인해 그 특별한 언덕을 밟고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역사라는 것이 참 매력적인 분야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르마스 성 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에르미타.
 고르마스 성 문에서 내려다 보이는 에르미타.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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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에 걸쳐 길이 남아있는 그 무엇은 본질을 변화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각 세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맞게 그들을 관조하며 느끼면 되는 것이다.

한 차례 옅은 비가 내리고 또 바람이 불어 금세 축축한 공기는 사라져갔다. 영원한 것은 없다. 단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만이 영원할 뿐이다. 그러나 시간, 그리고 자연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주변을 맴돈다. 위대함으로 둘러싸인 작은 우리, 작은 인류….

고르마스 성과 에르미타를 떠나는 길. 매들이 하늘 위를 날다.
 고르마스 성과 에르미타를 떠나는 길. 매들이 하늘 위를 날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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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태그:#에르미타, #고르마스, #스페인, #산 미겔 드 고르마스, #세바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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