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정식 군번을 부여받고 동원된 소녀병은 현재까지 23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박원호 국방부 예비역정책발전TF장(중령)은 5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각 군을 통해 확인한 결과 현재까지 파악된 소녀지원병은 23명"이라며 "육군이나 공군에는 없고 해군에서만 그런 사례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는 "소녀지원병 23명은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라며 "왜 해군에서 소녀지원병들을 동원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방부가 소녀병의 규모를 밝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00명이 넘는 소녀병이 동원됐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 가운데, 국방부가 소년병보다 더 부담스러운 존재인 소녀병의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소년·소녀병 1만4400여명으로 추정... "소녀병 1년 시절이 인생 바꿔"국방부는 '6·25 참전 소년·소녀지원병'을 "18세 미만의 병역의무가 없는 자로서 50년 6월 25일부터 53년 7월 27일까지 국군·국제연합군 또는 전투경찰대에 지원·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하고 제대한 자"로 규정하고 최근 그 실체를 공식으로 인정했다.
다만 소년·소녀지원병의 규모를 두고는 국방부와 국민권익위원회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국방부는 1만44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는 반면, 국민권익위원회는 총 2만2165명 중 1만7980명이 생존해 있다고 주장했다.
소녀병 규모도 마찬가지다. 국방부는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2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6·25참전소년병전우회'에서는 80여명이 징집됐고, 현재 14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100명이 넘는 소녀병이 징집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년병전우회측은 "50년 8~9월에 해군에서 여군을 모집했는데 1개월 남짓 훈련을 마친 뒤에 대부분 제대시켰다"며 "일부 소녀병은 10개월∼1년을 근무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군인'으로 평가받는 문인순(78·제주시)씨는 제주여중 2학년생이던 1950년 8월 "학도호국단 간부는 모두 해병대에 가라"는 체육교사의 명령에 따라 해병4기에 입대했다. 이후 40일간 총검술, 사격 등의 훈련을 마친 뒤 경남 진해로 내려가 해군본부에 배치됐다. 그는 당시 126명의 여성이 함께 징집됐다고 증언했다.
문씨는 "징집연령도 아닌 17세 이하의 어린 나이에 총을 메고 최전선에서 싸운 소년·소녀병들이 이렇게 찬밥이 되어도 되느냐"며 "정부가 소년·소녀병의 실체를 인정하고 희생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양이 고향인 이인숙(76)씨는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로 피난갔다가 국군 징집관에 의해 징집됐다. 그는 지난 2008년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수용소에 숨어 있었는데 국군 징집관이 '빨리 고향 가려면 군에 입대하라'고 해서 입대하게 됐다"며 "소녀병 시절 1년이 내 인생을 크게 바꿔 놨다"고 회고했다.
국방부는 지난 2008년 6월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실체를 인정하고 병적표에 '소년·소녀지원병'을 명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병적 정정' 작업은 올 연말까지 마무리된다. 또 2013년까지 <소년·소녀지원병 6․25 참전사>(군사편찬연구소)를 펴내 소년·소녀지원병의 참전사실을 전사에 기록할 계획이다.